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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성 김종호 선생께서 우리곁을 떠난지 어언 3년이 지났습니다. 참으로 덧없는 세월입니다만 선생을 추모하는 정은 더욱 푸르러 나옵니다. 우리는 그 사모의 정에 붓을 적셔 실로 훌륭한 당신 생애의 일부이나마 여기 새겨 후손들에게 보이고자합니다. 일찌기 백운산의 서기를 한 몸에 받고 1926년 3월 2일 광양읍 목성리에서 아버지 김재구씨와 어머니 이소악씨의 5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유년과 소년 시절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광양 승주 나주 진도군등의 여러 고을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진도보통학교에서 당시 굴지의 명문인 부산 제2상업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것은 선생의 총명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조국이 광복되자 다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극도로 혼란한 대학의 사정은 선생의 학구열을 채울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호국의 간성으로서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기위해서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군문에 들어섰습니다. 선생의 투철한 애국정신과 대의명분을 좇는 장부의 기개는 이때 깊이 가슴속에 새겨진것이 아닌가 합니다.그리고 꾸준한 자기연찬으로 말미암은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과 아울러 풍부한 교양을 갗추었으며 그 위에 언행일치의 힘찬 실천력을 가꾸어냈던것입니다. 그리하여 출중한 장군으로서게된 선생은 보병 제6사단장과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지냈으며 군복을 벗은 뒤에는 사업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아세아자동차공업회사의 부사장 금호산업의 사장을 거치면서 새 경영모델을 창출해낸바 있습니다. 또한 행정가로서도 전라남도지사와 건설부장관을 역임하면서 선생은 오로지 위민봉사의 투철한 정신으로 과감한 행정력을 발휘하여 명성과 추앙을 한몸에 받은 일 또한 너무나 생생한 기억입니다. 선생은 변화와 성취를 이룬분이었습니다. 김종호장교가 부임해가는 병영에는 엄연한 군기가 섰으며 김종호장군이 가는 부대는 항시 모범부대의 표상이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군수행정에 새 장을 열었고 파월 한국군을 아무런 차질없이 철수시킬수 있었던것도 장군의 공영였다는것은 이미 다 아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성 적자 내실기업이었던 극동철강공업도 김종호사장을 맞이하자 흑자운영으로 탈바꿈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의 그참담한때 전라도지사로 부임하자 광주와 전남도의 민심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동안 낙후되었던 이 지역에 광주권및 목포권 개발사업이 할발하게 추진되었고 진도연육교와 여수 돌산연육교가 착공되는등 전남도의 지도가 바뀌어갔습니다. 또한 김종호장관의 건설행정은 우리 건설업계에 새바람을 일으켜 한국의 건설업을 국제적 경쟁기업으로 도약시켰던 것입니다. 이렇듯 선생이 자기는 곳엔 하나 하나 빛나는 탑이 새로이 세워졌고 그 탑 그늘에는 화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선생의 탑중에서도 궁핍한 광양을 세계적인 제철의 항구도시로 바꾸어 놓은데서 찬연한 봉우리를 이룬것입니다. 선생은 애향의 표본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생을 못잊어하는것은 선생이 이룩한 업적보다도 너무나 인간적인 풍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의 그 소탈하고 따뜻한 인정미와 속깊은 배려와 굳건한 의리를 우리 모두 기리고 또 기리는 바입니다. 다시금 여기 선생을 기리며 창공에 날아간 한마리 학을 바라보듯 하염없는 추모의 정을 금할길 없습니다. 늘 굽어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