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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도 여수를 탈환한 진압군은 곧바로 부역혐의자를 색출하고자 도심지의 전 읍민을 학교 운동장 등의 공공장소에 집결시켰다. 당시 여수 도심지의 인구는 5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읍민들은 서국민학교(현 서초등학교) 운동장 등 도심지의 넓은 공공장소에 끌려와 수용되어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풀려났다. 그러나 진압군은 40세 미만의 주민을 부역혐의자로 간주하고 젊은 남성 600여 명을 따로 색출하여 오동도와 종산국민학교 (현 중앙초등학교)로 끌고 갔다. 1948년 11월 2일, 조선일보는 오동도에 학생 약 200명, 일반인 600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고 보도하였고, 경향신문은 1,063명이 수용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이 얼마나 학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수용된 인원 중 수백 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