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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최천택 선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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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택 선생은 부산(釜山) 사람이다. 의열투쟁과 청년운동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부산지회 부회장 및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최천택은 1920년 9월경 박재혁(朴載赫)·김영주(金永柱) 등과 함께 부산경찰서 사무실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일은 최천택과 상해에서 돌아온 박재혁에 의해 추진되었다. 박재혁은 상해에서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부산경찰서장을 죽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높이자는 제안을 받고, 이를 실행할 목적으로 폭탄 1개와 돈 3백 원 그리고 여비 5십 원을 받은 후, 9월 6일 부산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에 최천택은 김영주와 함께 박재혁을 만나 9월 13일까지 동래온천 일대를 돌아다니며 거사를 논의하였다. 그래서 9월 14일에 부산경찰서장을 죽일 것을 결심하고, 경찰서 사무실내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일로 인해 최천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최천택은 1923년 7월경 의열단원(義烈團員)인 강일(姜逸)을 만나 신임장(信任狀)·협박문(脅迫文)·관공리사직권고문(官公吏辭職勸告文)·의열단선전문(義烈團宣傳文) 등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래서 최천택은 1924년 12월 26일경에 합천군(陜川郡) 합천면(陜川面) 서산리(西山里)에 사는 이종연을 찾아가 자신이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최천택은 부산지방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4년 11월경 부산청년회(釜山靑年會) 주최로 열린 조선기근구제의연회에서 동정연설(同情演說)을 하였다. 또한 1925년 12월에 열린 부산청년연맹발기준비회(釜山靑年聯盟發起準備會)에 참가하였고, 몇일 후에 열린 부산청년연맹 집행위원회에서 서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1927년 7월에 열린 신간회(新幹會) 부산지회(釜山支會) 설립총회에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자 최천택은 서무부를 담당하였다. 1927년 12월에 신간회 부산지회 임원이 개선되었는데, 이때 최천택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2월에 열린 신간회 부산지회 정기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최천택은 부산지방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일제기간 중 수십차례에 걸쳐 구금되었으나 고문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