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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運動史(독립운동사) - 尹顯振 先生(윤현진 선생) 호는 우산(右山) 자는 명구(明九) / 출생지 : 경남 양산 상북면 소토리 내전마을 생존기간 : 1892.9.16.~1921.9.17.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건국훈장 : 독립장(1962) 日政(일정) 强占期(강점기) 祖國(조국)의 獨立(독립)을 위해 헌신한 윤현진은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한 후,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송진우(宋鎮禹), 장덕수(張德秀) 등과 항일투쟁을 하면서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고향 양산에 다가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통해 자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후배양성에 노력하였다. 당시 일제의 경제침략 정책으로 민족이 궁지에 빠지게 되자 선생은 일제의 착취정책에 항거, 농민의 자급자족으로 경제적 자주성을 확립 시킬 목적으로 안희제(安熙濟)와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협동조합 의춘상행(宜春商行)을 창립하고 농촌경제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국민소비조합운동이었으며 선생의 항일운동이 각 방면에 걸쳐 확대되자 일제에 감지되어 탄압이 더욱 극심하여졌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한 후, 국내에서의 독립투쟁이 불가능 상태에 이르게 되므로 中國(중국) 上海(상해)로 亡命(망명)해 先生(선생)은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년 4월 안창호(安昌浩),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노백린(盧伯麟), 여운형(呂運亨), 신익희(申翼熙)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으로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키 위해 선생은 미 선교사를 통하여 고향에 있던 사재 30만원을 임시정부에 헌납하여 임정운영에 재정난 해소에 앞장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 정원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서 선출되었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安昌浩)와 같이 주금(株金) 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을 했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기성회(國民代表會議 期成會)를 조직하여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항쟁을 헌신하던 선생은 결국 병을 얻어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892년 9월 16일 ~ 1921년 9월 17일 상해에서 30세에 요절(天折)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의 배일(排日) 수완가(手腕家)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까지 논평할 만큼 선생의 위치를 짐작할 만했다. 선생은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外人墓地)에 안장(安葬)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상하이 정안사 외인 묘지에 있던 선생의 유해는 1995년 6월 23일 대전국립묘지에 봉안(奉安) 안장(安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