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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비 소서 구한말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을 따라 망국의 풍운이 급박하여짐에 전국 각지에 의병이 봉기하였다. 특히 우리 고을에는 유명한 김죽봉 준과 심남일 수택과 전해산 기용씨등이 항일전쟁을 전개하였는데 본군 출신 박영근고이 전해산 진에 종군하여 호군장이 되어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시불리헤요 운모거의라 기유7월에 왜병에 체포되어 익년 7월 23일 대구형장에서 극형을 당하여 26세의 청춘을 구국의 충성으로 승화시켰으니 이 얼나마 처참한가 을유 광복후에 다시 항일투사를 闡楊(천양)하여 혹은 사봉제하고 혹은 입비기적한바 많으나 박공은 조년 성인하고 후손이 零替(영체)하여 泯滅(민멸) 무문에 이렸더니 인리 辛暻烈片冷範(신경열편냉범)이 발의하여 백하규 전군수및 각기관장과 유지 제씨로 박고기적비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비를 세울세 경비조달에 있어 다수인사가 낙선호의의 기풍으로 상응상수하여 부다일에 거역이 이성함을 보고 이 병○의덕을 잊기어려워 이 소비를 세워 방명을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