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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朴永根)은 전라남도 함평(咸平) 사람으로서 전해산(全海山)과 더불어 1907년 나주(羅州)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전해산 의진은 처음에 기삼연(奇參衍) 의진의 조경환(曺京煥)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그 지휘를 받았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하였다. 그후 조경환의 의진에서 1908년 4월부터 8월까지 함평·광주·장성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였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군대의 장비보강에 주력하였다. 1908년 8월 23일 전해산이 조경환과 갈라져 독립하여 의진을 형성하였을 때 박영근은 전해산 의진에 소속되었다. 전해산 의진의 진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장 정원집(鄭元執)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즉 호군장에 임명된 박영근은 군수품을 조달·운반하는 치중(輜重)을 담당하였다. 또한 접전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08년 9월 26일 영광군 불갑산(佛甲山)에서, 10월 9일 영광군 장본면 석문(章本面 石門) 안에서, 11월 3일 적량면(赤良面)에서, 22일 광주군 대치(大峙)에서, 25일 장성군 자인곡(自引谷)에서, 26일 순창군 내동(內洞)에서, 12월 8일 삼남면(森南面) 낭월산(郎月山)에서, 21일 식지면 대안촌(食知面 大安村)에서, 1909년 5월 4일 영광군 육창면 묵동(六昌面 默洞)에서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 및 경찰관과 교전하였다. 1909년 5월 28일 전해산 의진이 해산하자, 그 중에 30명을 규합하고 보병총 1정, 화승총 16정, 그리고 다량의 화약과 탄환을 휴대하고 독립 의진을 구성하였다. 6월 8일과 14일 함평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6월 19일에는 영광군 불리면 건두산(佛里面 乾頭山)에서 일본 수비대,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이후 7월 16·17일까지 영광·장성·광주·무장·나주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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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의한 짓을 혐오하여 의병을 빙자하여 민폐를 끼쳤던 박기춘(朴基春)과 김기순(金基順) 등을 1908년 10월과 11월에 처단하기도 하였다. 1910년 1월 영광 불리면 건두산(乾頭山)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나, 적 수십 명에게 포위되어 마침내 체포되었다. 광주지방재판소에서 1910년 6월 3일 유죄선고를 받고 1910년 7월 21일 사형선고가 확정되어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