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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碑(비)는 서기 一九五○년 六월 二十五일 北韓共産軍(북한공산군)의 不法南侵(불법남침)으로 우리 大韓民國政府(대한민국정부)는 釜山(부산)으로 後退(후퇴)하고 釜山(부산)을 除外(제외)한 其外地域(그외지역)은 共産軍治下(공산군치하)에 있었다. 同年(동년) 九월 十五일 全南(전남) 和順郡(화순군) 北面(북면) 瓦川里(와천리)에 居住(거주)한 曺慶鎬(조경호) 十七세, 任玉柱(임옥주) 十七세, 朴旼錫(박민석) 十七세 등 三인은 共謀(공모) 共産黨(공산당)을 反對(반대)하는 壁報文(벽보문)과 不遠間(불원간) 我國軍(아국군)이 收復進駐(수복진주) 할 것이라는 傳單(전단) 一○○여매를 作成(작성) 마을 要所要所(요소요소)에 附着(부착) 流布(유포)하고 다음 날은 이웃 面(면)으로 擴大(확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인 九월 十六일 不幸(불행)하게도 北面分駐所(북면분주소:지금 파출소) 隊員(대원)에 綻露(탄로) 全員(전원) 逮捕(체포)되어 分駐所(분주소)에서 三일간 郡內務署(군내무서:경찰서)에서 三일간 至今(지금)의 全南警察廳(전남경찰청)에서 四일간 敎導所(교도소:형무소)로 押送(압송) 四일간 收監(수감)되어 背後操縱者(배후조종자)를 糾明(규명)할 目的(목적)으로 몽둥이 毆打(구타),물 拷問(고문) 등 죽음에 가까운 問招(문초)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