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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청풍면에서는 화학산 정상에 전쟁진지 고지가 있었으며 능선 따라 장흥군 유치면 국사봉 지구에 인민군 유격대가 준동한 지역이다. 1951.4월 화학산을 점거한 350여명, 말봉산에 180명 나주지역에 준동한 30여명을 포함한 560여명의 무장공비들을 소탕하기위해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이양초등학교에 8사단 주둔지역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야음을 타고 반란군의 기습공격으로 아군 26명이 산화하였다.(이십곡리 무명용사 비문) 1951.12월 청룡리에서 장흥유치 국사봉에 있는 인민군 박달부대와 혈투로 인민군 소탕작전 전투가 있었는데 상호간 피해가 막심하였다. 한편 아군예비사단과 인민군 전투가 봉미산에서 벌어졌는데 아군 일개부대가 산화하는 피해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며 그후 군경합동으로 무장공비 소탕으로 인하여 화학산의 수복이 제일 늦게 이루어졌다(화순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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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두만강 혜산까지 진입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이때 중공군 50여만명의 참전 인해전술에 미려 1951.1.4 후퇴로 서울을 거쳐 수원까지 후퇴하였다. 아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1951.3.15 국군은 서울재탈환하였으며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4.12 맥아더 워수가 해임되고 지리웨이 장군이 UN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전쟁에 자신을 잃은 북한이 소련을 통해 6.23 말리크UN대표가 휴전회담을 제의하자 UN은 7.27 전쟁이 종전됨으로 3년 1개월만에 참담했던 6.25전쟁은 쌍방에 큰 손해를 남기고 민족분단의 비극을 다시 맞게되었다(역사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