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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구천동 밤하늘 별이 되리라 장암 김남관선생 공적비 여기 무주에서 태어나시어 무주를 위하여 평생 몸과 마음을 바치신 선생의 거룩한 뜻을 기리며 그 공적을 후대에 빛내고자 이 비에 새긴다. 선생은 1921년 1월 29일 무주군 무주읍 대자리에서 부친 장장원씨와 모친 임성녀씨의 장남으로 출생하니 본관은 김녕이시다. 선생은 무주초등학교를 나와 일본에 유학하여 이공계학업을 마치고 그 분야 기술직에 종사하다가 경찰간부가 되어 내무부 치안국 통신과장을 역임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군사학문을 익히고 졸업하여 한국전생에 참전 영예의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셨다. 군 복무를 계속하여 육군대령으로 승진 육군제502통신단장 육군통신학교 교장등 육군의 통신분야 주요요직을 두루거치고 1967년 예편하여 꿈에도 잊을수 없는 산자수명의 고장 무주에 다시 돌아오셨다. 일찍이 선생은 군 복무시절인 1958년 가을, 추석 성묘차 귀성하여 은사이신 당시 무주초등학교 김환형교장을 예방하였다. 그 자리에서 구천동에 가거던 빼어난 절승지가 많으니 탐승할것을 권유하는 은사의 당부를 깊이 새기고 구천동에 가서 조상의 성묘를 마치자 구천동 계곡을 비롯하여 주변 산기슭을 샅샅이 탐승, 그 수려함에 심취하여 구천동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기로 뜻을 세우셨다. 그 후에도 선생은 구천동 답사를 거듭할수록 구천동이 관광자원으로서 최적지라는 확신을 갖게되어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관광지의 개발에 온 정성을 쏟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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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1960년 초 육군본부 통신과장 재직시 무주 구천동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면 우선 군 부대의 힘을 빌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 방안을 연구한 끝에 덕유산에 무선중계소 설치를 착안, 이 계획을 상부에 건의하여 마침내 승인을 받아 덕유산 통신소의 개소를 보게되었다. 이로부터 구천동은 군부대 주둔으로 문화 경제 교통등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으로 1961년 봄부터는 차량이 자유롭게 구천동을 통행함으로써 그 동안 감추어졌던 구천동의 신비스러운 절경이 세상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선생은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김환형 현종호와 함께 구천동 입구인 신라통문에서 덕유산까지 장장 70리 계곡을 도보로 답사하여 33경의 절경지와 고적지를 선정,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명칭은 옛부터 전해져 온 원명은 그대로 살리는것을 원칙으로 하였디만 명칭이 없는 몇 곳만은 새로 이름을 지었다. 한편 구천동의 숨겨졌던 절경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길이 관광개발의 필수요소임을 깨달은 선생은 다시 유지들의 협력을 덛어 약3년간에 걸처 명승지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촬영하여 '무주의 전망' 이라는 제호의 사진첩을 발간하였다. 선생은 이를 전국의 주요 도서관과 교통부를 비롯한 정부 유관기관에 배포하여 무주 구천동이 관광지로 최적지임을 설득하며, 국가의 관광지로 지정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62년 4월 12일,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의 10대 관광지'의 하나로 무주 구천동이 선정되었다. 이 사실이 신문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으로써 구천동은 일약 전국적인 관광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6.25동란에 소실되었던 백련사를 복구하는 한편 한풍루도 이전 복원하였다. 이로서 무주군내 각 기관과 유지 등이 적극호응하여 1963년 초에 무주관광협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구천동 관광지 개발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구천동은 한국의 유명 관광지임은 말할것도 없고 세계인의 관심까지 갖게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국 최고의 명승관광지 무주 구천동은 이러한 배경하에 탄생되었으며 국립공원으로써 빛나는 앞날을 기약하게 된것은 오로지 선생의 높으신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엄숙히 여기에 밝힌다. 비록 선생께서 1976년 11월 22일 유명을 달리 하셨지만 무주 구천동 계곡 굽이굽이마다 칠봉산 봉이봉이 마다에는 선생의 고귀한 고향사랑의 뜨건운 열기가 살아있어 덕유산의 수호신으로 영원히 빛날것을 우리 모든 무주인은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 무주에서 태어나 무주를 위하여 살다가 하늘로 떠나신 선생이시여 무주 구천동 밤하늘 별이 되소서 이 글은 김남관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초안하여 작가이며 평론가인 박경석장군이 감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