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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곤 장군 추모비 태백의 정기를 받아 소백에서 뻗어난 비슬산은 팔공산과 더불어 달구벌을 넘어 나라를 지켜온 방패이었다. 이 비슬산 자락에 호국의 영웅 유치곤장군의 늠름하고 장한 동상이 우뚝 솟아 그 팡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맑은 물에 찬란히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 모습 자랑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님은 기계유씨의 후예로 1927년 7월 대구광역시 달성군 쌍계리에서 유정님의 셋째 아드님으로 때어나시었다.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의 육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 1949년 12월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 1951년 4월 공군소위로 임관 그해 10월 11일부터 F-51전투기를 조종하게되었으며 그로부터 1953년 8월16일까지 가장 짧은 기간에 공군사상 최다 출격의 기록인 203회를 세워 세인을 놀라게 했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적의 진격을 가로막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평양근교에 있는 승호리 철교의 폭파는 거의 불가능한것을 이루어낸 기적의 전투로 알려져 있다. UN군이 500여 차례나 출격을 해서도 폭파하지 못한것을 절묘한 전술로 이를 폭파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전투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 군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후에도 평양의 대폭파작전 송림제철소 폭파작전 고성351고지 탈환작전등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는데 이바지 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님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각각 세차례를 비롯하여 미공군비행훈장등 12회에 걸쳐 각종 최고훈장을 수훈함으로써 전투조종사로서의 최고의 옝예를 안았다. 또한 새천년 1월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님을 호국인물로 선정하고 전쟁기념관에 흉상을 봉안했다. 이와같이 군관밍이 한뜻으로 혁혁한 님의 전공을 기렸다. 일찍이 님의 전공을 위해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는 보는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님은 전후에도 전투지휘관으로 남아 전력증강과 공군의 발전에 온 정성을 다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196년 1월 1일 과로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님의 헌신적 희생에 온 국민은 애통해 마지않았다. 님은 추계추씨와의 사이에 삼남일녀를 두었으며 장남 용석에게 못 다한 꿈을 이룩하게 하기 위해 공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켜 뒤를 따르게 했다. 용석은 26기로 임관되어 비행조종사로 크게 활약해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역시 안타깝게도 1982년 2월 5일 꿈을 펴지도 못한 채 임무 수행중 불의의 비행사고로 가신 아버짐의 뒤를 따랐다. 님은 부자 2대에 걸쳐 우국충정을 창고에 바쳐 조국의 위기를 구하는데 이바지했다. 님은 또한 바쁜 전쟁중에서도 고향을 찾아 마을의 안전을 걱정하고 살피는 자상함을 보이시기도 했다. 구향사람들은 님의 빛나는 전공과 불꽃같이 타오르는 우국충정을 영원히 기려 국민의 귀감으로 삼기위해 여기에 유치곤장군 기념관을 세우리고 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지금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우려 왔다. 이 일에 적극 호응해주신 행정당국과 공군의 아낌없는 협조로 마침내 오늘 그 보람을 맺게된것이다. 님의 육신은 갔어도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은 이 동상과 더불어 영원한 군신으로 찬란히 솟아 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이 비슬산을 가득 메워 국민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것이다. 명에 가름하여 우러러 찬양하는 바이다. 나라 위해 바친 넋은 푸른 하늘에 반짝이고 불꽃같이 타오르는 충절은 만고에 푸르르니 이제야 님의 뜻은 비슬산에 꽃피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