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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시위는 10월 1~2일에 달성군부터 시작해 2~3일 칠곡.고령, 3일 성주.김천, 4일 영주, 영일 등 19개 군으로 파급되었으며 10월 6일경 대부분 진압되었으나, 항쟁은 전국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당국은 대구와 경북에서 대구 10월항쟁 관련자 7,500여명을 검거했다. 검거된 사람 중에는 취조과정에 가혹행위를 당하거나 석방된 뒤에 보복을 당한 경우도 있었으며, 적법절차 없이 사살된 경우도 있었다. 군경의 탄압을 피해 관련자 중 일부는 입산하였는데 입신자에 대한 토벌은 한국전쟁 전까지 계속되었다. 경찰은 토벌 과정에서 입산자 뿐 아니라 대구 10월항쟁 관련자 또는 남로당 가입자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으며 대구 10월항쟁과 무관한 지역유지와 주민 중 일부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 희생자 중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수는 총 60명이나, 이 결과는 대구.달성, 칠곡, 경주, 영천지역의 일부만 조사하여 확인된 것으로 실제 희생규모는 이보다 몇 배 이상될 것으로 추정된다. ●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목적으로 1949년 4월부터 정부가 만든 관변단체로 경북도연맹은 1949년 11월에 결성되었고, 대구지역은 1950년 2월 이전에 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가입자들의 대부분은 좌익전향자로 해방 직후 남로당 등 좌익단체에 가입했거나 좌익에 협조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그 규정이 광범위하고 자의적이어서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는 물론 무고한 국민들도 상당수 가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발발 당일 치안국장은 전국 경찰에 평소 요시찰인으로 분류하여 감시하던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전원 구속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예비 검속한 국민보도연맹원을 6월 말부터 9월 중순경까지 전국 각지에서 집단살해하였다. 대구에서는 1950년 7~8월경 경북지방경찰국 및 산하 대구지역 경찰서 경찰, 육군정보국 소속 경북지구 CIC와 CIC 대구파견대, 대구 주둔 제22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달성군 가창골, 경산시 폐코발트 광산, 수성구 수성못 인근 야산, 본리동, 송현동, 팔공산 등 여러 곳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대구지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1,000여 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