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page


59page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는 헌종 12년(1846)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장수 현감 정주석이 비문을 지었다.
59page

국난을 당하였음에도 구차스럽게 살려고도 하지 않고 절개를 굽히지도 않는 것은 열사에게도 어려운 일일진대 한갓 여자로서 대의를 판단하였으니 그 어찌 열렬하지 아니한가. 그 당시를 생각해보건대 늠름한 열기가 해와 달처럼 밝았을 것이니 그 어찌 장엄치 아니한가. 산에는 영스런 풀이 있고 물에는 맛좋은 샘이 있으니 군자들이 칭찬하거늘 하물며 사람의 이름과 절개가 천성에 근원해서 사람의 이목에게까지 퍼져있는 경우에서랴. 부끄럽게도 나는 육순의 보잘 것 없는 선비로 끝내 덕업을 이룬 공이 없지만 매양 이사람 같은 훌륭한 공과 의로운 충렬에는 삼가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항상 깊이 감동하고 감개하였다. 지금 의기의 이름을 세워 후세에 전하면서 늘 그녀의 영향을 따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삼가 글로 적어두려 한다.’ 오종근『장수지방 금석문화』, (장수문화원, 1999). 55쪽.
59page

1846년에 세운 이 비는 호비정거리(현 흥부집 골목(옥거리)) 장수읍 277번지 이의종씨댁 정원에 있었다.(시장과 가까움) 1942년 11월 일본순경과 한국인 서모형사의 지시로 부수어 묻으라는 말에 의기에 찬 인부 5인은 부수지 않고 가마니에 싸서 땅에 묻음. 1945년 8월 20일 일본신사를 불태우고 수명비를 재 발굴(장수초등학교 제34회, 5학년 1반 학생들 12인, 비각의 위치를 알려주신 분은 전 교육장 김상근 선생님 또는 다른 분이라고도 함)하였다. 다음날 비각을 신축하고 장수리 19번국도로변에 세웠다(단청은 못하였음). 이 때 참여인원은 지도자 2인(오인승, 이재순 선생), 목수 4-5인, 비석을 씻어 준 부인 4인외 많은 분들이었다. 숭정기원후사병오 구월상한 지현서원 정주석 삼가글을 짓고 아들 유학 기영 삼가 글을 씀 비유사 밀성 박길인 출처 : 장수 문화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