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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 김재환 소장 선운사 수호공적비 6.25는 비극이었다. 1950년 그 해 6월 우리 배달겨레의 반만년 역사속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으며, 한반도의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우리 자유 대한민국을 북한 인민군이 남침하여 조국의 산하를 처참히 아비규환의 폐허로 몰아넣어 우리 민족은 동족이면서 동족이 아니었다. 그래도 하늘은 언제나 자유대한의 편이었기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을 다시 찾고 전세는 역전되었으나 미쳐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잔당과 지방 빨치산들이 선운사를 본거지 삼아 밤이면 주변 민가로 하산하여 방화, 살인약탈을 일삼으며 준동함에 공비토벌을 위한 군,경 합동작전이 연일 계속되었다. 그 때 고창경찰서 반암 출장소에는 소장 김재환 경사와 직원 15명이 배치되어 낮에는 순찰등 일반경찰업무, 밤에는 공비침투에 대비한 경비근무로 치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밤이면 선운사를 지휘본부로 삼은 공비들의 만행이 점점 심해지자 국군은 선운사를 소각하여 공비들의 은신거점을 소탕하기로 결정하고 소나무 다발 등 불쏘시개를 준비한 상태에서 김경사에게 소각을 명하였으나 김경사는 '공비들의 토벌은 시간문제이나 선운사 소각은 역사와 문화유산 모두를 잃는 것이니 소각작전만은 철회해 달라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역사 앞에 죄를 짓는 명령에는 응할 수 없다. 지역치안 책임은 경찰에 있으니 내 관할은 내가 책임지고 지키겠다'고 국군측을 설득하여, 목숨을 걸고 작전수행을 완강히 거절하매 국군측도 소각계획을 포기함으로써, 천년 고찰 선운사는 소각의 일촉즉발 위기에서 수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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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찬란하게 빛나는 선운사의 우뚝 선 위용에는 김경사의 불교사랑과 문화애호 정신, 그리고 내 지역 치안은 내가 책임진다는 경찰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기억하자. 이제 한국전쟁이 멈춘지도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 김경사도 90세를 바라보는 노구이건만, 그간 몇 사람 지인들 간에 구전으로만 전해지며 묻혀져가는 김경사의 공덕이 안타까워 부처님을 섬기는 선운사 불자들이 신도회, 고창경찰서 후배들이 뜻을 모아 그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자 선운사 동구 길섶에 빗돌 하나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