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page


64page

하여 국내외의 항일운동을 촉진하려던 거사였는데 불행하게도 그 전날에 고깔봉 광산에서 살인사건이 났기때문에 잠복하고 있던 일경의 비상망을 뚫지 못하여 부득이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물러서서 차기를 약속하고 최대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철저한 점조직으로 수십명의 동지를 더 모았고, 약간의 무기도 준비한채 개뱔적 연락으로 대사를 의논하던 차 였다.동지가운데 배신한 사람은 없고 일경의 주구로 형사부장이었던 김모, 양모등 한인의 친일적 감지에서 유발된 탄로였을 뿐이다. 모두 심한 고문에 빈사상태에 이르고 말았는데 특히 이의사는 심한 매질로 말미암아 회생 불능상태에 이르자 1945년 7월 17일에 지정된 신풍의원 진료대에 채 오르기도 전에 강심제마저 아랑곳없이 못다핀 한의 생애를 마친것이다. 이의사는 육당의 고사통을 정독하면서부터 더욱 역사의식이 투철한 애국학생으로 발심하게 되었다 한다. 늘상 비장한 거사를 설득함에 있어서 이의사는 감자는 제몸을 썩혀 없애가며 새싹을 키운다. 우리는 조국을 소생시키는 이미 감자가 되자라는 구호를 외치곤 하였다. 이의사가 이끌던 화랑회사건은 광복이 되면서 불굴의 애국정신으로 칭송받고 이농의 선후배들은 이와같은 순수한 애국활동이 모교에서 있었다는 높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화랑은 살아있다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한 바도 있다. 주제는 모든 거사의 책임을 이의사의 자기 희생으로 감내한 점을 높이 산것이다. 유족으로 아우 상태는 오옥자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의사의 하늘을 받든느 기둥같은 투지와 애국심을 길이 이나라 젊은이의 귀감으로 삼고 오랜 빛과 말씀으로 받들고자 하는 정성으로 이에 사료와 들은 바를 가려서 적어 경개하기를 위와 같이 한다. 김제군수 최봉규및 지역사회 유지와 유족의 뜻을 함께하여 비를 세우기에 앞서 문학박사 이병기는 글을 짓고 청암 이상록은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