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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의 비서실에 근무하던 사실이왜경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소위 불정선인으로 각인찍히면서 가편되고 경찰에검속되어 곤욕을당한때도 있었다 그것이 자녀들 교육마저 공립학교는 모다녔건 원인이 되었으며 자신이나 당내까지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않는 항명의 행동으로 실천하였으니그때의 호적이 기록으로 증거하고 있다. 굵직한활동으로만 보아도 김제군이 건국청년단 독립촉성회 대동청년단 그리고 전라북도 노동총연맹 부위원장등의 조직과 영도로 공헌하였고 1952년 김제을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바 있으니 이 고장의 명예에 그칠수 없고 우리나라 반공민주주의 정사에도 의당 재조명되어야 할 업적이 현저하다. 반공을 도맡다시피하셨으되 숙명적으로 일관한 투쟁은몇개면모만을 열거해도 된다. 2.26사건때도 재빠른 예지와 용기를 가지고 쉽게 수습한 사실이며 6.25직후인 7월19일에는 인민군이 만경강을 건너오기 시작할때 청년단원을 이끌고 오로지 사수일념으로 청?면장산리 뒷산에 보루를 확보하고 4시간의 저지전투에 들어가 겨우 3명만의 부상자를 내면서 남진을 막으며 시간을 끌었던 사실과 9.28 수복뒤에는 모악산일대에 준동하는 인민군들이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을때 청년단원을 이끌고 군경합동으로 지장의 계략을 써서 소탕작전으로 딴 지방보다먼저 이 고장의 평온을 쉽게 찾아주었으니 그러한 실천수범이 멸사봉공이저 버릴수 없는 시대적 여망의 보답에따라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추앙되었던것으로 안다. 이제 우리에게 향토의긍지를 갖게하고 대쪽같은 의리와 지기의 본보기가 되었던 공께서는 잠든 호명산의 유택을 벗어나 양지바른 이곳 성산에서 이 고장의 발전과 평화의 수호신이 되어 아름답고 더 맑고 밝은 후세들의 복받은 삶터가 되도록 음우해주실것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