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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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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영국 유학을 마치고 190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에서 세관으로 근무하던 중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병호, 병주, 병오 세 아우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독립군에 자금과 무기를 조달해 준 사실이 간도 일본 총영사관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상하이로 탈출해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1926년 5월 이국 땅에 잠들었다. 묘지는 상하이 정안사 영국인 공원묘지에 안정됐으나 중국문화혁명 때 손실됐고 뒤늦게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2008년 3월1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출처 :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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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한 고을의 어진 선비도 뭇사람의 존경을 받거늘 하물며 한나라의 높고 맑은 절개와 의리를 지켜 평생을 나라사랑하는 일에 바치신 분이라면 온겨레의 우러어 모심을 받아 마땅치 않은가. 여기서 잠시 발을 멈추고 옷깃을 가다듬어 이 고을에서 태어나신 나라의 선사요 애국지사이신 한분의 생아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 분은 곡산연씨로 이름은 병호요 호는 단명이며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군 도안면 석곡에서 내어나셨고 일찌기 향리를 떠나 중국의 만주와 북경등지에서 학업을 힘쓰시다가 경술국치국치를 당하자 이분을 못이겨 항일운동에 몸을 던져 젊은의 혈조 드높이 투장하던중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로 들어와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청년외교단을 결성 항일운동에 적극할동하시다가 1920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 옥고를 치르시고 나오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여운영 김구등 동지들과 시사책진회를 경성 안팎으로 변해가는 정세에 대처하며 항일 진영을 더욱 굳게 뭉치는데 노력하시다가 1925년 일부 불순분자들의 책동을 규탄하는 교정서를 발표 큰 반응을 일으켰다. 같은해 남경에서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셨으며 1932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오르셨고 혁명및 독립공론사를 창건 이론적으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쓰셨으며 다음해 신한독립당이 결성되자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을 맡아 반공구국 운동에 앞장서셨다가 1937년 불순분자의 밀고로 일경에 붙잡혀 7년 옥고를 또 치르셨으니 선생께서는 해외망명 투쟁생활이 몯구 25해에 전후 두차례에 걸쳐 십년동안 옥창생활을 겪으셨다. 조국의 해방을 맞아 1948년 ㄱ괴산군민들의 추대를 받아 최대 제헌의언에 당선되셨고 1950년 다시금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시어 국정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시면서도 생활은 한결같이 청백과 염결을 굳게 지켜 한치의 어긋남없이 언제나 두루마기 고무신 차람으로 맑은 바람을 나부끼셨다. 1963년 1월 26일 세수 70을 일기로 저 세상길 떠나시니 각계에서 애도하여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모셨으며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