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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支暑主任 李燮晉 永世不忘碑) 剛明莅事 濟之慈仁 (강명이사 제지자인) 鎭玆一區 傍及外鄰 (진자일구 방급외린) 家家懷德 人人迎春 (가가회덕 인인영춘) 路上片石 永年不泯 (노상편석 영년불민)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에 임하여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한 고을을 잘 다스리고 그 덕이 이웃까지 미쳤도다.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말자. 전쟁이 발발하고 대전이 함락되기 하루 전 1950년 7월 19일 오후, 용화면 내 3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용화초등학교 뒤 창고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7월 20일 영동군 내 3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영동읍내 어서실과 석쟁이재, 상촌면 고자리에서 집단학살을 당했습니다. 이는 의로운 경찰 이진섭 지서장의 용기있는 행동때문이었습니다. 1950년 7월 18일 오후에 영동경찰서장(김경술)은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오전에 (이시환) 도경국장과 특무대(CIC)파견대장으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입니다. 지서장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모두 지서나 창고에 격리 집결시켰다가 특무대에 인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유치장도 특무대가 관리한답니다. 바로 실행하십시오." 여기서 보도연맹원이라 함은 해방 후 격동기에 "농토를 나눠 준다", "비료 공급해 준다"라는 이야기에 도장을 찍은 것이 남로당과 농민회의 가입서가 되었으며, 대다수의 우익. 좌익의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수한 농업인들로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보도연맹원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었습니다. 이진섭 지서장은 창고를 탈출할 수 있는 도구를 창고 안에 넣어두고, 보도연맹원 중 한사람에게 은밀히 당부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까 막아둔 봉창으로 빠져나와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게." 보도연맹원들은 그날 밤 모두 탈출을 했습니다. 30여명중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습니다. 1951년 말 이진섭 매곡지서장으로 발령을 받는데, 이를 아쉬워하는 용화주임들은 지서장앞에서 눈물을 흘렸으며 다음해 11월 11일 주민들은 이섭진 지서장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를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