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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중순, 금강변에서 기진맥진한 킬패트릭 일병은 동료들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어젯밤 새까맣게 금강을 건너 몰려오는 북한군을 그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아군 조명탄이 금강 위를 벗어나 방어진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강상의 북한군은 어둠 속에 사라졌고 아군은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됐다. 결국 중대장 지시에 의해 부대원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허벅지 상처를 동여맨 킬패트릭은 쩔뚝거리며 참호를 나왔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중대원들을 놓치고 말았다. 새벽녘에는 이미 누런 황갈색 복장의 북한군들이 주변에서 서성거렸고 그는 논두렁 밑에서 3일을 꼬박 굶으며 버텼다. 그때 마침 논에 물길을 대고 원두막에서 쉬고 있던 금남면 영대마을 주민들이 그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20여 가구가 사는 작은 시골마을 주민들의 ‘킬패트릭 구하기’는 약 2달간에 걸쳐 계속됐다. 많은 미군 낙오병과 우익인사들이 북한군에게 체포 즉시 처형되는 살벌한 시기였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주변 광산굴(현 금남면 영대리 산 51번지)에 이 병사를 숨겨두고 끝까지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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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목숨을 구한 킬패트릭은 아군 북진 시 부대로 복귀했다. 이 병사를 구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은 당시 이장이며 주민의 깊은 신뢰를 받았던 임헌상(당시 40세·농업) 씨였다. 그는 위험 속에서도 동네 사람들이 미군 병사 보호에 동참하도록 설득했다. 더구나 일부 좌익 주민들까지도 이장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임헌상 씨의 선행은 마을 입구에 있는 그의 공적비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전쟁 이후 미국의 킬패트릭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는 병을 얻어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생명의 은인이 있는 한국에 꼭 오고 싶지만 지병으로 인해 오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킬패트릭 여동생 편지가 또다시 왔다. 오빠의 병이 악화돼 결국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목숨까지 걸고 나를 보호해준 영대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고. 출처 : 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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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動亂 敗殘美兵 人死無歸 경인년 동란때 패잔병이었던 미군을 무사히 귀환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