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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사형과 체형으로 간혹 열과 기력이 다 빠져 허수아비로 일생을 마치기도 하였으니 그 처절한 광경은 목불인견이였으며 천인공노할 학대로 옥고를 마친 후의 피골이 상접한 참상 어찌 필설로 다할 도리가 있겠는가. 실로 인류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참사가 전개되었든 것이다. 우리 군민은 다 같이 옷깃을 가다듬고 그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또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상기하면서 지성에서 우러나는 추모의 정을 아낌없이 다 바쳐야 할 것이다. 이수욱은 전의지방 운동 주모자로서 고등법원서 징역 1년 6개월 복역하다 혹독한 사형으로 손과 발가락이 탈락하여 종신병자가 되였고 추경천은 1년 2개월, 추득천은 1년 고법판결로 옥고를 치루었다. 홍일섭은 조치원지방 주동자로서 사적비가 있으며 유시풍과 같이 1년 징역에 김봉식, 조의순, 추영복, 임덕문, 이덕민은 징역 10월, 장홍진, 장기민, 윤상원, 이장희, 이광희, 정원필, 윤자벽, 윤자훈, 이수양, 윤상돈은 6개월 징역형에 임헌규는 6개월 2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유진광, 임희수, 임헌상, 윤상은, 윤자명, 이규영, 이상건, 정상복은 태형 90도에 임숙명, 임만수는 60도로 육체형을 받으니 재야 법조계는 소요사건으로 주장하였으나 가중처벌키 위하여 복심 및 공주지방법원은 모두 보안법 위반죄를 덮어씌웠든 것이다. 윤봉균은 중학생의 신분으로 백방노력하여 독립선언서를 입수 이를 다수 복사하여 주야불철 공주와 연기 지방을 왕래하며 살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출판법 위반죄로 공주지법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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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진은 소년의 몸으로 대망을 품고 일본 동경에 건너가 동경철도학교에 입학 수학 중 민족적 차별 대우에 분노를 품고 약소민족에 관한 저서를 다류 탐독 독립사상을 배양하던 중 선각자 현광조와 접선 우리조선독립운동 구룹을 조직 백방 활동하다 1942년 3월에 전원 검거되여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19세 미성년으로 동경소년원에 수감 천신만고를 적다. 왜제의 8.15항복으로 석방되니 3년 5개월 만에 광명의 천지를 보게 되다. 강금종은 20세 청년으로 도일 대판경판상업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한 후 적색사회주의를 연구 우리 민족의 살길은 조국독립에 있음을 자각 왜정의 조선에 대한 차별적 식민정책에 민족적 반감을 가지고 독립을 희구하는 동지 김봉각과 결탁 백방 운동을 전개하다 1942년 10월에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2년에 구류 200일 통구형에 처해서 옥고를 치루다. 김재황은 왜정 말기에 연전학생대표로 조국독립운동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하여 비밀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1년 9월에 검거되어 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에 구류 400일 통구형의 판결로 복역하다. 박노일은 일본 유학 중부터 조국광복운동에 참가한 후 귀국 종제와 같이 도만 임시정부 소재지로 향하다 북경에 도착 광복군 지하공작대와 접선 공작대책으로 다년간 활동 중 수차 왜군에 체포되여 천신만고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탈출하여 다대한 공적을 쌓았고 1946년 봄 임정요인과 귀국하였는데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자 표창을 받다. 황갑수는 유시부터 향리 독립운동가와 학교에서의 민족사상가의 감화를 받아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왕성하던 중 1944년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여 중국에 파견된 후 독립군이 되기로 결심 왜진에서 탈출 광복에 입대 우군과 같이 양차에 왜병 10여명을 ○살하여 그 공으로 상위로 진급되고 백방활약하다 1946년에 임정요원과 귀국하니 청년 독립운동가로서 추앙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