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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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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월에 생환하다. 당사하여 간재 선생은 의사로 조문을 올리고 일반인사들은 군내 유일한 배일거사라 칭찬하니라. 장재규는 재학의 실제니 그 행적이 형과 동일하여 완도로 귀양가서 1년 여를 고생하다 왜정 말기에 청주형무소에 무작정 예비 구속 중이라 하루는 금식하는 사기를 분쇄하며 파편으로 할복 자결코자 하였으나 날이 둔하여 미수에 그쳐 그자들의 극력시료로 소생하였다가 8.15의 광복으로 해방되니 세사인사가 다 난형난제라 칭송하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불국수도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평화가 회복되는 동시에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우리 조선독립이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가 왓다하여 유지자가 모든 방법을 강구하든 중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조선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를 고창하니 삽시간에 전 장안에 만세운동이 파급되고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체포되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시에 수라장이 되니 불과 수일내에 삼천리 강토가 독립만세 운동장이 되고 이천만 동포는 모두 독립만세 운동원이 되었다. 극악무도한 왜병들은 도처에서 방화 살인 구타 체포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수백만 명이 희생물이 되고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그 광범하고도 치열한 민족운동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뿐아니라 희생의 처참함도 또한 공전절후의 생지옥이였던 것이다. 우리 지방에서도 모사에 당하여 동지간에는 동생동사할 것을 굳게 맹세도 하고 노소간에는 책임을 전담할 뜻을 분명히 약속하기도 하였고 거사에 있어서도 이 동리서는 자발적으로 백주에 앞 강변에 운집하여 목이 터지도록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저 지방에서는 선도자의 영솔하에 총동원하여 밤중에 높은 산에 올라 횃불을 휘두르고 화토불을 피우고 닭이 울 때까지 천지가 진동토록 운동을 벌이기도 하는 등 그 양상은 다기다양하였으나 숭고한 독립정신으로 행동한 점은 동일한 것이였다. 군내 방방곡곡 만세운동이 일지 않은 곧이 없고 군민 모두가 독립운동자 아님이 없었으나 하기 여러 의사들은 투철한 독립정신과 극렬한 만세운동으로 왜병에 체포되여 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