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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출신 독립의열 명사 숭모비 고종 병자때 개명에 눈을 뜬 왜제가 감언이설과 무력위협으로 조일수교 조규은 후 침략의 독아를 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권침탈에 영일없더니 을미보호조약으로 국권의 거반을 상실케되자 우국지사는 각지에서 궐기하여 조약의 폐기와 국권의 회복을 주장하여 만반수단과 방법으로 운동을 벌렸으나 사태가 여의치 못하매 귀중한 생명조차 홍모와 같이 희생하는 열사가 속출하더니 불과 수년에 경술국치를 당하매 이천만 동포는 국적없는 노예가 되고 삼천리 강토는 지도가 왜색으로 변하매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을 타도하고 국내외에서는 조국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할 뿐 아니라 국민된 자는 누구나가 다같이 비분강개 절치부심을 발양하여 적수공권으로 왜적을 쳐부수고 독립을 ○도함은 물론 왜적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나라 귀신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생명을 끊는 의열인사가 다수 발생하였으니 우리 지방인들 어찌 열외가 될 수 있으리요. 하열 여러 선생들의 고절탁행은 그 찬란한 빛이 능히 일월과 같고 호국애족의 숭고한 얼은 가히 전체 국민의 귀감이 되기에 족하도다. 오강표는 보성인이니 호는 무이재며 전간재 문인으로 학행이 到底(도저)하더니 국세가 일비하매 세사에 뜻이 없어 쾌쾌하며 공주 명강산중에서 묻쳐살더니 을사국변이 일어나자 토적시를 지어 관찰사 이도재에게 바쳤으나 거절당하매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고 아편을 청인에게서 매음하였으나 무독한 것이어서 기사회생하니 혹자는 광인이라 하더니 경술국치를 당하매 절명시와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격문을 짓고 공주향교에 가서 지은 글을 벽에 붙이고 일장 대성통곡한 후 강학루에 올라 목매어 자살하니 때는 음 10월 16일이더라. 남면에 순절비가 있어 만인 추앙의 대상이 되고 제3공화국에서 포상되여 길이 후손에까지 명예가 미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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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영은 강화인이니 호는 연초라 학행이 특이하여 향천으로 가자통정대부하다. 환로의 무상함을 깨닫고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국운이 비색하매 항시 침식불안으로 지내다가 무책을 자책하고 증왜시 및 국망 한시를 공주 무성산하에 두고 보령성 주산중으로 둔세하더니 익년 경술에 국치를 당하매 다시 살 뜻이 없어 무연히 지내던 중 당지 헌병대서 왜제의 상치 은사금 받으라는 통지가 있자 어찌 국적의 금품을 받으랴 하고 결연 거절하니 박해가 자심하므로 풍한설야에 응급피신 천안 광덕산중에서 초근목피로 연명 중 천안 헌병대에 탐지되어 체포 압송중 풍세들을 지나다가 대소변을 칭탁하고 그 자들의 가석을 얻어 잠시 가작하다 그 눈을 피하여 큰 둠벙에 용약장신하니 그 자들의 구출한 바 되였으나 적개심을 품고 익일 조조에 절명하니 때는 갑인 음 2월 10일이요 향년 79세더라. 장재학은 결성인이니 호는 경암이요 전가재 제자니라. 학행이 유별나서 일반의 추앙을 받았는데 왜적의 침략으로 국세가 일비하매 항사 적개심을 품고 일언일동이 배일일색이더니 을사와 경술의 치욕이 있자 우국애족의 의분으로 왜적의 백성으로서의 성명을 공문서에 등재함을 불인하여 면사무소에서 관람하는 체 민적을 파열투사하고 세금과 부역을 일절 거부하며 신생품은 불용하고 불복종 무저항주의로 일관하니 고도절해인 경상도 금도에 귀양으로 3년고를 치루고 서울 감옥에 구금된 채 년여를 지내되 자작 송엽분으로 연명하다 급식이 들어오자 식기를 파열하여 파편을 呑下(탄하)하니 그 자들의 기계인출로 토사는 되였으나 토혈수승에 기사지경이였다. 석방되자 피골이 상접하여 인형을 잃었음으로 유지자가 자가요양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