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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것은 민족정기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많은 국난이 있었지만 한말 국치에 비기겠는가? 민족의 굴용은 죽음보다 견디기 어려운 자유와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돌보지 않고 의연히 일어나 독립운동에 앞장선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농암 곽성신선생이다. 선생은 현풍인으로 서기 1889년 10월 6일 고 휘 우영 비 김해김씨의 독자로 강경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있는 순천에서 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농촌계몽운동을 열심히 하던중 서기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3학년의 젊은 학도로서 학우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 하였다. 선생은 뜻한바있어 독립선언서 한장을 몸에 숨기고 강경으로 내려와 동지인 석광렬과 박금봉 그리고 강세형등과 힘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 시위군중에게 배포하여 그해 3월 10일 강경 옥녀봉에서 시내까지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다 풀려났다. 그러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하여 그해 5월 우리민족은 혜성같이 빛나게 살자는 뜻으로 혜성단을 조직하여 5년간의 활동으로 30여명의 단원을 규합하였다. 모금된 자금으로 지사 엄창섭을 돕고 탄압이 심하여 을유년에 양촌면 반곡리 차고과 신양리로 은인하여 살다가 광복과 더불어 연산으로 옮겨 혜성단을 다시 부활시켜 그 명칭을 3.1운동동지회로 바꾸어 그 뜻을 살렸다. 이러한 애국심은 지방사업이나 육영사업에까지 끼쳐 연산중하교 설립에 협력하였고 3.1동지회 논산대표로 일하다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서기 1973년 5월 20일에 연산리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의 조국독립에 헌신한 공적을 어찌 표창과 포상으로 대신하겠는가 그 숭고한 애국충절과 유덕을 이 비에 새겨 기리 영세에 전하여 보는 이의 귀감이되게하고져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