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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소년 한완봉의 묘 반공소년 한완봉은 1934년 6월 4일 강경읍 동흥리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한택수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던 그는 강경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통신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고장에서 공산당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결심하고 백인기(당시28세)씨를 중심으로 모여진 애국단체에 가입하였다. 한군이 맡은 일은 전단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일이었다. 그는 "머지 않아 너희들은 멸망한다" "너희들은 천벌을 받는다" "비록 놈들 밑에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는 등 수십 여종의 전단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돌렸다. 전단이 나돌자 놈들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한군도 놈들의 마수에 걸려들게 되었다. 전단을 뿌리던 중 놈들의 앞자비에 붙들려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악랄하고 지독한 고문을 하루에도 수차례씩 당하였고 심한 고문으로 한군은 몸 한군데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결코 굽히거나 비굴한 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너희 공산당 놈들이 너무 나쁘고 악랄해서 내 스스로 한 일이다]라고만 말할 뿐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공산당을 꾸짖었다. 놈들은 한군을 총살시키기 위하여 옥녀봉 밑 강변으로 끌고 갔고 한군은 동흥리 자기의 집쪽을 바라보며 [어머니, 어머니!]하며 나지막하게 두번 읊조렸다. 애절하고 처절한 부르짖음이었다. 그런 다음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때 총소리가 새벽공기를 찢고 울리더니 한군의 가슴은 새빨갛게 물들여졌고, 놈들은 한군의 주검이 주민들을 자극할까 두려워 지체없이 강물에 버렸으나 어붕에 의해 건지게 되어 성동면 불암산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강경 주민들에 의해 채운산정에 이장되었고, 피로 얼룩지고 총탄이 뚫고 간 흔적이 있는 태극기는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어 6.25 당시 공산당의 만행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후 홍안의 소년으로 뚜렷한 국가관을 가지고 반공투쟁을 벌이다 숭고하고도 장렬한 최후를 마친 한군의 반공애국 정신은 불길처럼 번져갔고, 6.25 당시 민간인 희생자 한완봉을 비롯한 38위의 호국영령을 위한 충혼탑이 채운산정에 세워졌고 매년 9월20일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