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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월당 김상정 추모비 1918년 고종황제의 승하(昇遐) 소식을 듣고 대명의리(大明義理)라는 네 글자의 혈서를 써서 기(旗)를 만들어 세우고 대성통곡해 백성들의 슬픔을 자아냈으며 이로 인해 이듬해에 발생한 역사적 독립운동인 3.1만세운동의 산파 역할을 수행해 낸다. 그리고 1919년 정초에 단지하여 태극기를 그리고 혈서로 격문을 써서 민족의 의거(義擧)를 촉구하였으며, 한 달 후에는 또다시 혈서로 격문을 써서 민중의 봉기를 재차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항일운동과 투철한 독립정신은 자연스럽게 일본경찰로부터 요주의 대상자가 되어 3·1운동 직전에 일본경찰에게 납치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혈서와 의기(義旗), 격문 등을 모두 빼앗긴다. 그 뒤에 일본경찰이 한월당 김상정 선생을 찾아와 한일합방은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지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취지로 그를 회유하자 일본경찰을 몽둥이로 마구 구타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일경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1922년에는 호별세 세금통지서가 그에게 전달되자 남의 나라를 빼앗은 놈들이 세금까지 내라고 한다며 분노하여 또 혈서로 일본 황제와 조선총독을 꾸짖는 한시를 써서 동봉해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는 통지서와 함께 반송하였다. 또 1924년에는 전매령(專賣令)이 내려져 담배 경작을 못하게 하자 동리 사람들과 공모하여 담배 경장을 계속 한다. 결국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룬다. 이같은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서서 끊임 없는 투쟁으로 한월당 김상정은 일제의 행정에 협조하지 않는 대표적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일본 경찰과 갈등을 빚는다. 1933년에는 행정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되었을 때 일본 경찰이 한월당 김상정을 삭발하려 하자 일본 경찰의 손을 물어 뜯어가면서까지 삭발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상복을 입고 지냈는데 1937년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에 거주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그의 상복을 벗기려 하자 완강히 거부하다가 일본 경찰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하여 허리와 다리 등에 골절상을 입기도 한다, 김상정은 평생 동안 이 같은 항일 투쟁을 벌여왔으며 해방 후 그의 항일정신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 한월당집(寒月堂集)이 있으며 서산시청 앞 공원에 한월당 김상정지사추모비가 서 있고 성연면 고남저수지 근처에 그의 묘지와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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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청앞을 재 탐방하여 비석의 후면을 재촬영하였고, 김상정지사의 묘소탐방앨범도 같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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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시 운산면사무소앞 항일애국지사 용곡 허후득선생 기념비, 고 육군중령 소병문 전적비, 고 이순태 추모비, 효암 유흥수선생 생가, 정헌태선생 기념비, 진충사, 백림 김용환의 생가,묘비, 정순왕후생가, 서산 김기현가옥, 취평리 소운 이봉하선생기념비, 인회 김정득선생 추념비, 나라사랑공원 내 나라사랑기념탑, 독립유공자탑, 6.25참전유공자탑, 월남참전유공자탑, 황국신민서사지주, 시청앞 한월당 김상정지사 추모비, 복제 이철영의사 추모비, 애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