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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는 1884년에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진압했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항쟁을 진압했다. 임오군란 때 탐관오리로 단죄되어 유배되었다가 국권피탈 후 일본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대표적 식민은행인 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과 휘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토지강탈에 앞장서 수많은 동포들이 토지를 잃고 먹고 살기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방랑하게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해 고려인이 되었다. 민영휘는 명성황후의 조카로 명성황후의 비밀회계장부를 관리했었다.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시해를 당한 후 명성황후의 재산이 민영휘의 손으로 굴러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이섬의 이름이 ‘남이섬’인 이유는 그곳에 남이장군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남이장군의 묘가 있는 곳을 친일파 자손이 소유하고 있는 현실. 기자가 휘문고등학교에 갔을 때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교정에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정신을 토속적 시어로 표출한 시인. 친일이 싫어 절필한 시인. 그는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 1929년부터 1943년까지 교사로 재직했다.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휘문 100년과 친일파 민영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