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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지 하기가 이루 셀 수 없었읍니다. 특히 日帝가 대륙침공을 위한 韓中離間策으로 萬寶山事件을 일으켰을 때 선생은 저들의 底意를 미리 알아채고 그 허위조작임을 폭로하여 國內 華僑와 수십만 在滿洲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케 했고, 이를 계기로 韓中 兩民族의 友好와 臨時政府의 유지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뒷날 한국독립에 도움을 주었읍니다. 선생은 밖으로는 하와이 등지에서 열린 汎太平洋民族會議에 대표로 참석하여 각국의 유력인사와 끊임없이 접촉하고 국제친선에 힘쓰는 동시에 안으로는 미국 카나다 등에서 온 선교사들의 종교 및 교육사업에 대한 日帝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서 神社參拜 지시에 불응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여 歐美諸國과의 友誼를 두텁게 하였읍니다. 선생의 일생은 자나깨나 民族保全과 獨立達成 바로 그것이었읍니다. 그러기에 내외동포들은 선생이 이끄는 東亞日報를 形態 없는 政府로 믿고 의지했으며 선생을 우리 민족의 등불로 믿고 따랐읍니다. 패망을 앞둔 日帝가 제一차로 선생에게 여러번 통치권을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光復을 맞자 국내외 국민의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國民大會準備會를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모체로 삼았고 海外亡命人士들이 귀국하자 還國志士後援會를 결성하여 힘껏 뒷바라지 하였읍니다. 또한 日帝時代 초기부터 국내에 침투해 온 공산주의의 實相을 간파하고 꾸준히 젊은이들을 올바로 啓導해 온 선생은 해방후의 혼란을 틈 타 공산당의 赤化野慾이 노골화되자 汎民族陣營을 통합하여 韓國民主黨을 창당하고 그 대표로서 首席總務에 취임하였으며 信託統治案이 전해지자 반탁운동을 위한 대책 강구에 분망하던 중 1945년 12월 30일 반민족적 무리의 흉탄에 그 高邁한 일생을 마쳤읍니다. 선생은 제1회 汎太平洋民族代表者會議에 참석한 후 歸國船上에서 집필하신 <世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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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勢와 朝鮮의 將來>라는 名論說에서 당시 韓半島의 국제정치적 운명을 정확히 예언한 바 있읍니다. 선생은 歷史의 進運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과 탁월한 識見을 갖춘 분으로서 民族不滅·日帝必亡·獨立必至의 확고한 신념, 굳은 지조, 웅대한 포부와 經世方略, 비범한 통솔력, 불굴의 鬪志와 넘치는 覇氣로 日本帝國主義 및 共産主義와 싸우며 암흑시기에 국내에 우뚝서서 이 민족을 수호한 獨也靑靑의 기상이었읍니다. 어느 史家는 말하기를 임진왜란 때에는 無力하나마 政府가 있었지만 日帝침략중에는 그나마도 없는 때에 선생이 이 겨레에게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고 이끌어 왔으니 그 공적은 忠武公 이후의 偉業이라고 찬양한 바 있읍니다.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되 자기 한몸이나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였고 남에게는 항상 공경하는 자세로 마음껏 즐겁게 대하였으나 다른 한편 衆人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말없이 深思熟考한 뒤에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내세웠읍니다. 인품이 호탕하고 개방적일 뿐만 아니라 感興이 일면 붓을 들어 능란한 솜씨로 漢詩를 짓곤 하였읍니다. 선생이 하와이에 가시는 船上에서 얻은 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읍니다. 南北東西不見洲(사방을 바라보아도 뭍은 안보이는데) 連天水色閑行舟(하늘과 맞닿은 물빛 속에 뱃길만 한가롭네) 安將眼下太平洋(언젠가 눈 아래 태평양 물로) 滌盡人間萬古愁(만고에 쌓인 인간의 근심을 씻어내 볼까) 이제 선생이 가신지 38년만에 그 거룩한 抗日獨立과 愛國反共의 遺志를 후세에 전하여 길이 民族의 師表로 삼고자 이곳에 뜻을 모아 銅像을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