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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나라를 잃은 이래 日帝의 압박에 신음하던 35년간 國內 敵陣 속에서 이 겨레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우시던 代表的 民族指導者이며 光復 전후 공산당의 정체를 미리 看破하고 그들의 흉계를 봉쇄하여 오늘날 民主的 삶의 기초를 닦아주신 古下 宋鎭禹선생, 獨立運動家요 言論人이요 政治家요 敎育家로서 智勇이 兼全했던 그 위대한 一生(1890-1945: 潭陽出生)은 겨레를 위한 獨立爭取의 血鬪이었으며 投獄과 迫害와 유혹과 모함의 가시밭길이었읍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孫文이 제창한 三民主義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民族主義로 무장하고 겨레의 자유와 권리를 伸長하기 위하여 民主主義를 信奉하였으며 백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民生主義를 追求하였고 이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문화적 독립을 위한 民文主義를 救國과 獨立의 思想的 基礎로 삼아 투쟁하였읍니다. 선생은 어려서 漢學을 수학하고 日本 明治大學 法學部를 졸업한 뒤 1916년 中央學校 교장으로 취임하여 人材養成에 힘쓰고 널리 民族精神과 獨立思想을 일깨우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차대전 말기에 民族自決主義가 제창됨을 계기로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읍니다. 이때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天道敎, 基督敎, 佛敎 등 各宗團과 학생 기타 국내세력간의 提携를 이룩하고 日本 中國 및 歐美에서 활동하던 志士들을 연결하여 民族大同의 기틀을 마련하고 三·一운동을 일으킴으로써 亡國 十年만에 回天大業의 민족항쟁을 主導하였읍니다. 선생은 이 운동을 계속 확대하고 뒷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獨立宣言書에 署名하지 아니하였으나 곧 구속되어 獄苦를 겪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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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獄후에는 仁村金性洙 선생과 함께 東亞日報를 이끌고 이를 항일독립운동의 발판으로 삼아 이 민족에게 씌워진 멍에를 가로멘 채 獨立을 위한 줄기찬 항쟁을 先導하였읍니다. 己未獨立宣言 이후 7년만에 純宗이 돌아가심을 계기로 六·十만세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고 그로부터 10년후에 다시 베르린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한 마라톤 선수 孫基禎의 가슴에 달린 日章旗를 지운 채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日章旗抹消事件을 일으킨 것 등은 끊임없는 독립투쟁의 一例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日帝가 愚民政策을 쓰려 하자 선생은 여러 해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강연을 하고 民立大學建立의 추진, 文盲退治運動의 전개, 여성지위 向上, 班常打破, 지방색 解消, 스포츠 普及, 유능한 技能人 및 優良어린이를 찾아서 표창하는 등 우수민족역량의 배양에 힘썼으며 日帝가 백성의 재산을 뺏고 民族資本의 集成을 방해하자 선생은 物産장려운동을 일으키고 당시 범람했던 日製 물건의 배척운동을 추진하며 貧困打破와 農工竝行 등 국력배양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日帝가 文化抹殺政策으로 言語, 文化 및 유적 등을 없애려 하자 선생은 새로 연구된 한글맞춤법을 널리 보급하고 新文學을 장려하며 「朝鮮의 노래」 등을 제정하여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주력함으로써 文化民族의 긍지를 높이는 한편 檀君, 世宗大王 및 忠武公을 모시는 三聖祠의 建立運動을 펴고 李忠武公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牙山 顯忠祠와 閑山島 戰蹟을 重修하며 權慄장군의 紀功祠를 重建하는 등 민족의 얼을 고취하였읍니다. 또한 日帝가 民族抹殺政策으로 移民 混血 및 創氏를 강요할 기미를 보이자 선생은 이에 결연히 대항하고 南北만주 및 中國에서 활약하는 獨立軍에게는 군자금을, 외지에 흩어진 離散同胞들에게는 위문금을 모아 보내고 愛國烈士들의 유가족을 부양하거나 獄苦를 치르는 동지들을 자상하게 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