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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극동사령부 해군정보장교 클라크대위와 한국해군 정보부대 KLO-8240부대원은 1950년 9월 15일 01:40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힌다. 이 등대불을 신호로 유엔군은 261척에 달하는 연합함대가 05:00부터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상륙주정(LCVP) 20척에 분승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하였다. 6:33에 녹색해안(Green Beach)인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6:55에 월미산 105고지 정상을 탈환하였고 8:00 월미도를 확보한 후 정오 쯤 소탕작전을 완료하였다. 월미도 상륙작전시 미 해병대의 총피해는 부상자 17명이었으며,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대대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므로 미 극동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에게 북한군 첩보활동을 위한 부대 창설을 요청했다. 함명수 소령, 임병래중위, 홍시욱하사등 17명 대원으로 구성된 해군 특수첩보대가 비밀리에 창설된 배경이다. 해군 첩보부대는 8월 18일 1ㅣ00에 어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나 6일째인 8월 24일 서해 영흥도에 도착했다. 작전보안을 위해 첩보작전의 거점인 영흥도에 도착해서야 함소령은 대원들에게 작전(작전명X-Ray)의 목적과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했다. 특수첩보대 대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인천과 서울, 수원을 왕래하면서 북한군에 관한 첩보활동을 펼쳤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전, 영흥도를 기점으로 첩보활동을 펼치던 특수첩보대에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철수준비를 서두르던 2:00, 한국군의 첩보활동을 뒤늦께 감지한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했다. 영흥도에는 17명의 첩보대원과 영흥도 청년방위대원 6명만 남아있었다. 첩보대원들은 해안에 정박해 둔 마지막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두고 영흥도 전투에서 8명의 해군 첩보대원과 영흥도 청년방위대원 6명들 14명이 전사했다. 이 후 북한군은 영흥도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그 동안 한국해군 첩보대와 클라크 첩보대에게 적극 협조해한 영흥도 청년들을 학살하였는데, "한국전쟁" 2의 기록에 의하면 "9월 16일 미 해병대가 영흥도를 점령해보니 클라크가 퇴거한 직후에 1개 대대(400명 정도)의 북한군이 상륙하여 아군에게 협조한 부락민 50여명을 참살했음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희생자들의 호국정신과 영흥도 주민들어 갸륵한 애향심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