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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귀리는 한동안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근대 사상 및 평등 의식과 민족 의식을 갖추어 의식 수준이 진보적이었다. 1948년 5월 10일, 의귀 초등학교에서는 군인 12명과 남원 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5·10선거가 치러 졌는데 마을 청년 7명이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후에 지서 습격의 주범으로 몰린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지금의 의귀 초등학교에는 당시 제9연대 소속 군인 2중대가 주둔했다. 학교 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 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매일 오후 6∼7시에 '폭도를 소탕하러 간다'고 나갔는데, 어느 날 토벌대는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학교를 나간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자, 그 정보를 접한 무장대들은 학교를 습격했다. 이날 토벌대 6∼8명이 전사한 반면 무장대는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무장대의 피해 정도는 80여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부상자와 사망자가 동료들에 의해 산으로 이송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무장대가 후퇴한 후 군인들은 무장대에게 자신들의 토벌 작전 정보를 제공해 줬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 20∼30여명을 총살하였다. 이들은 남원으로 이송될 예정인 주민들이었다. 시신은 한 곳에 가매장했었는데 수개월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었다. 몸에 신표가 있는 시신들은 가족들이 찾아갔으나 나머지 10여 구의 시신들은 지금의 제3의귀교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합장을 했다. 이 의귀리의 합장묘역이 2004년 이곳으로 이전한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