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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중문면 출신 896위 영렬들의 이름을 60년만에 빗돌에 새겨 이 곳 천제연공원에 세우고 신원하려 하니 슬른마음 가눌 길 없소이다. 제주4.3사건ㅇㄴ 광복후 건국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갈등으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하여 1954년 9월 21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때까지 6년 6개ㅝㄹ간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추돌진압과정에서 주민 13,564명이 무참히 희생된 사건이다. 1948년 11월 6일 새벽 면소재지인 중문마을에 무장대가 습격하여 면사무소, 중문중학원, 양곡창고등에 방화하여 그 주변일대는 불바다가 되었고 요인납치, 약탈로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중문면 12개 자연마을마다 크고 작은 무장대의 습격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해안선에서 5킬로 이상 중산간지대를 적성지대로 포고령이 내려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으로 남녀노소가 무차별 학살되었다. 10여개 촌락 주민들은 본동으로 이주시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옥은 불태워졌다. 본동마을에서도 도피가 가족이나 사상불순자등으로 낙인찍히면 마을향사에 동원집결된 주민들앞에서 총살시켰다. 육지형무소및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주민도 다수이고 서귀포경찰서로 연해되면 정방폭포 주변일대가 학살현장이 되고 중문지서로 끌려오면 자운당골, 버리왓, 대습우영,신사터, 천제연 주변이 학살현장이되었다. 밤이면 무장대의 습격과 노략질에 시달리고, 낮에는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조사협박에 떨며 살았던 험난한 시절 그 고통과 슬픔의 세월을 어찌 말로 다할수 있으랴. 문민정부에 이르러 줄기차게 전개된 4.3사건 진상규명운동이 결실을 보아 2000년 1월 12일에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어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이 국가공권력의 남용으로 제도도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데 대하여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여 용서.화해, 상생의 계절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