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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으로 우리나라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때 정부(대통령 이승만)에서는 예비검속령을 발령하여 무고한 양민을 구속학살하였다. 제주에서도 각 경찰서별로 무고한 양민을 구금하였고 이 구금자들을 재판판결도 없이 공산주의자취급 제주주둔 해병대에 인계 학살하였다.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다. 제주도에는 제주 서귀 모슬포 성산포등 4개소에 경찰서가 있었고 서귀포경찰서의 관할은 남제주군 중문면 서귀면 남원면 등 3개 면이었다. 서귀포경찰서에서도 이 3개면의 무고한 양민 200여명을 당시 서귀면 서귀리 587번지 오일시장 내 옛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하였다가 그해 7월 29일(음력 6월 15일)과 8월 10일(음력 6월 27일) 두차례 제주주둔 해병대에 인계 바다에서 학살수장한것으로 추측된다. 경찰에서 예비검속자 명부를 공개하지 아니하여 그 수를 알수없다. 본회 회장단(회장 이방춘)이 당시 모슬포주둔 해병대 3대대장이었던 김윤근(경기도 구리 거주)을 찾아가 학살일자와 그 장소및 그 수를 알려줄것을 요구하였으나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답변이고 또한 해병본대 정보과장이었던 고광수는 이 학살사건에 직접관려한것으로 심증이 가나 역시 모른다는것이다. 당시 많은 시신이 일본국 대마도에 표류하여 갔다는 소문이 있어 2003년 10월 1일 제주도 4.3유족회에서 대마도 현지에서 위령제봉행시 본회 고문 김기석씨가 동행 현지에서 탐문한바 당시 대마도 신문기자 阿比留繁藏씨의 증언인즉 한국6.25전쟁때 4.5명씩 사슬에 손이 묶인 시신이 상당수 인양 화장하여 太平寺 경내에 납골하였으며 몇구의 시신은 西山寺 뒷산에 매장하였다는데 지금은 죽림이 우거져 그 매장장소를 찾을수 없을것같다. 이 시신들이 제주바다에서 표류하여 왔음을 입증할수있는 자료는 찾을수 없었다. 분명 여름철 조류여서 제주바다에서 흘러간 시신임이 틀림이 없을것으로 심증이되나 입증하지 못하여 유해를 모셔오지 못하고 있다. 이 시신이 제주인 유해임을 입증할수있는 자료수집에 노력할 것이다. 입은 있어도 말못하든 세월 50년이 지난 2001년 7월 24일(음력 6월 15일) 서귀포휴양림 거린사슴에서 3명의 유족들은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봉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해 8월에 삼면유족회를 결성(회장 이방춘) 매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로 하고 2002년 3월부터 제주도 서귀포시 남제주군의 지원으로 서귀포시 하원동 762번지1의 528평 부지를 매입 제단조성사업을 시작 2004년에 완공하였다. 삼면유족들은 처음 끌려가 학살당한날로 추정되는 음력 6월 15일을 추모의 날로하여 매년 이날에 위령제를 봉행한다. 위령비에 학살당한 80위 함자가 새겨져있다. 그수가 200위가 넘을것으로 추측되나 유족들을 찾지 못하여 모두를 기록하지 못한 한을 금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