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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밀양박씨 규정공파 11세손인 충정공.(중략)..일찌기 전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목단강 철도국에 근무하든중 8.15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광복직후 혼란한 세파속에서 대한독립촉진회 회장 대한청년단장 면의회의원등 사회단체 대표로 지성인으로서 無毁無譽(무훼무예)로 민생안정과 치안질서유지와 지역사회발전을 위하여 크고 작은 현안사업의 선봉에서서 멸사봉공하였으며 특히 여순반란군사건과 6.25남침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은 전쟁터가 되었으며 전선은 곧 낙동강까지 후퇴하였으니 후방은 바야흐로 암흑세계가 되었다. 이 때 공은 전선따라 부산까지 종군하였다가 9.28수복과 함께 귀향하자 난세의 영걸이 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에 패퇴하던 그들은 퇴로가 막히자 지리산으로 잠입하여 밤이면 수시로 민가에 내려와 식량과 생필품을 약탈하고 관공서를 기습하고 불사르며 양민을 납치하여갔으니 주민들은 전율속에서 참혹 그대로였다. 주민들은 인민군치하에서는 반동자로 수복되자 부역자로 몰리는 이중고로 생사의 기로에서 곤경에 시달렸다. 이런 와중에서의 공은 혜성같은 존재였다. 공은 공비소탕작전의 틈바구니속에서도 사경에서 고통받고있는 동지들을 피아를 막론하고 구출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때로는 선무공작으로 자수를 권고하고 피의자를 방면케하는등 주야를 불문하고 동분서주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민생안정과 인명구제에 희생적으로 헌신봉사하였다. 도처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으로 참화가 빈번하였으나 이 고장에는 인명피해가 전무하였으니 이 아니 더 다복한일이 있으리요. 이는 오로지 공이 아니고서는 감히 염두조차 못할 쾌거를 해낸 희세의 대장부였던것이다. 그러기에 공은 만민의 생명의 은인으로 추앙받을 의인으로서 그 공덕을 길이 천추에 빛날것이다. 공이 가신지 어언 35년 그 값진 애국애족하신 숭고한 봉사정신과 크나큰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면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