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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지구 의용전투특공대 전기 조국이 위태로울 때 목숨을 구국의 제단에 바친 충혼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역사의 흐름에서 늘 후손드레게 삶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20세기의 한 중간이 1950년, 삼천리 금수강산이 포성과 화약연기로 얼룩지던 암울한 시대에 향토방위와 치안을 위해 젊은 혈기를 떨치고 일어난 무용용사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남원지구 의용전투 특공대원들이었다. 그 해 6월 25일,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남한을 기습침략한 북한 인민군들은 낙동강전투에서 국군에게 참패하고 북으로 퇴로의 길을 찾았으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퇴로가 막히게 되자 2만여명의 잔단들이 지리산 골짜기로 숨어 들었다. 소위 지리산빠치산이라고 불린 이들은 보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밤이면 민가에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 가고, 인명을 살상하며 관공서를 습격하여 주민들의 삶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이에 의분을 느낀 남원지역 청년들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때로는 공비들로 부터 노획한 빈약한 무기로 그들과 목숨을 건 전투도 했다. 그러나 특공대원들에게는 군번도 물론 피복이나 식량, 하다못해 낡은 군화 한 켤레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가슴은 충혼의 젊은 열기로 불탔으며, 평화로운 조국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는 숭고한 염원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1951년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의해 서남지구전투사령부와 백야전투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될 때에 이 지역 지리에 밝은 특공대원들은 항상 척후병으로 군경작전의 선발대가 되어 평화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1953년 일부 군부대는 일선으로 복귀하고 서남지구전투경찰대가 창설되면서부터는 특공대원들은 전투경찰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열악한 무기로 생사를 넘나드는 공비들과의 싸움에서 백여명의 꽃다운 목숨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제 지리산 계곡에 총소리와 화약냄새가 사라지고 평화의 산새소리를 다시 찾은지 어언 40여성상, 그날의 20대 활기넘친 젊은이들은 지금 백발의 노병으로 하나 둘씩 흙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젊은 혼을 조국의 산하에 바친 영령들은 분단조국의 한을 안은채 구천을 배회하고 있으리라. 오늘날 때 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살아남은 노병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여기에 탑을 세우고 천도를 비는 뜻은 님들의 거룩한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고 조국통일의 지표로 삼기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