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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삼남의 지붕에 공산비적이 반거하게 된 것은 1950년 낙동강 선까지 남침했던 북괴군이 우리의 총 반격에 다시 쫒기어 가게되자 그 일부가 지방공비와 합류하여 이곳에 숨어들게 됨으로 부터이다. 당시 이들 적도의 세는 2만에 달하였는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하여 도량하되 그 지역이 동으로는 의령, 서로는 고창, 남으로는 보성, 북으로는 금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향민의 학살과 납치, 재물의 약탈과 방화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적기가 나부끼는 양상이 되었다. 이에 그해 말부터 이곳 남원을 중심으로 국군 6개사단과 2개 독립 연대, 그리고 6개 독립대대및 전투경찰 4개연대와 7개 독립대대, 그리고 11개 경찰서의 의용경찰과 대한청년단 특공대 등이 힘을 모아 ㅇ들을 함께 무찔러, 1952년을 고비로 그 세를 꺽고 1954년에는 조직의 뿌리를 잘라 드디어 이를 초멸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때 이 평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어찌 오늘 이곳 곡창세서 격양가가 메아리 칠수 있었겠는가? 다시금 고개숙여 그날의 충혼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