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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소련제 전차를 앞세우고 38도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인 남침을 자행하였다. 남한은 전쟁발발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7월말에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낙동강에서의 총 반격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개입으로 38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협상이 열리면서 현 휴전선 부근에서 장기간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치르다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되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민족간의 6.25전쟁은 분단의 장벽만을 남긴 채 한반도의 약 80% 전화(戰禍)에 휘말리게 하고 남한측만 해도 약1천만명의 전재민(戰災民) 및 민관군과 유엔군을 합하여 215만명의 전사상자와 실종자를 발생시켰다. 북한은 정전협정을 어긴채 무장공비 침투, 대통령 암살기도, 민간항공 기 테러 등의 끔찍한 도발을 자행하고 최근까지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핵무기 개발 등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수많은 전사자와 유가족, 상이군경, 고향을 떠난 피난민, 전쟁고아 등 을 남긴채 지금도 민족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있다. 이 땅에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끔찍하고 참혹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이를 기억하는 것이 6.25전쟁의 교훈이다. 과거 목숨을 바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낸 수많은 6.25참전 국가유공자와 유엔군에 감사하며 그들을 영원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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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월남)참전의 역사적 의의 1960년대 들어서면서 '남베트남(월남)에 대한 북베트남(월맹)의 침략행위가 증가하자. 남베트남의 정부미국은 자유우방국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호소했다. 6.25전쟁 당시 유의 지원을 받았던 대한민국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의 공산화를 감지하기 위해 국군의 과정을 결정하고 단계적으로 파병하였다. 1954년 9월 11일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단이 베트남을 향해 부산항을 출발하면서 첫 파병이 시작되었다. 이후 1965년 3월에는 비둘기부대(건설시킨단, 1965년 10월에는 전투부대로 청용.맹호부대.1966년에는 백마부대를 파병하였다. 또한 파병부대의 군수 및 수송을 지원하기 위해 십자성부대(제100군수사령부), 해군 백구부대. 공군 은마부대를 창설하였다. 한국군은 파리평화조약에 의해 1973년 3월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까지 8년여 기간동안 연인원 32만여명이 참전하였다. 이것은 건국 이후 최초이자 최대규모의 해외파병이었다. 이과정에서 5천여명의 젊은이 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대·소 부대 작전을 비롯해 의료·건설 및 현지 주민에 대한 지원활동을 통해 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국제적 신의를 획득했고, 한국군의 현대화를 이루었으며,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우방군의 일원으로서 한국군이 보여준 자유수호의 정신과 용맹함 은 국군의 해외파병사 뿐만 아니라 세계 전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 기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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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취지문 이 참전유공자명 비는 6.25전쟁 및 월남전에 참전한 동대문구 참전 유공자의 위국 헌신의 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분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립하였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번영은 참전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37만 동대문구민의 뜻을 모아 이 참전유공자명비를 세워 나라사랑의 참된 의미를 후세에 전하고자 합니다. 2014. 12. 29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청장 유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