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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징. 원점타격작전의 효시. 몽금포작전 ...정치적, 이념적 군사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육군 14연대의 반란사건, 육군 8연대 제1대대, 제2대대의 월북사건등과 더불어 해군에서는 공산좌익세력들에 의해 함정 4척이 납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손원일해군참모총장은 비장한 각오로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북한의 도발을 강력하게 응징하겠다고 이승만대통령께 보고했다. 서해첩보부대 이태영소령의 정탐을 통해 1949년 8월 10일 납북된 미국 군사고문단함정이 황해도 몽금포항에 계류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보감 함명수소령에 의해 즉각 응징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작전계획은 PG-313(충무공), JMS-301(대전), 302(통영), 307(단천), 309(대동강), YMS-503(광주)등 함정 6척의 엄호하에 20명의 정보부대 특공대원이 몽금포에 기습상륙하여 납북함정을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작전개시일은 이승만대통령을 모시고 정부수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해군관함식을 거행하는 1949년 8월 16일로 정했다. 작전계획에 따라 아 함정 6척은 8월 16일 새벽2시, 정보부대 특공대원 20명을 싣고 정대사령 이용운중령의 지휘아래 인천 월미도에서 출항했다. 적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백령도 남쪽과 몽금포 서쪽을 돌아 8월 17일새벽 몽금포근해에 도착했다. 해득 뜰 무렵 새벽6시 아 함정들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몽금포항구로 접근하는데, 적 해안초소와 부두에 정박한 함정에서 아 함정에 대해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고무보트 5척에 분승된 함명수소령등 특공대원들은 아 함정들의 엄호사격하에 빗발치는 적의 총탄을 뚫고 항내로 돌진해 나갔다. JMS-302정장 공정식 소령은 특공대원들에 대한 근접엄호 필요성을 느껴 함수에 정착된 37밀리 대전차포로 응사하면서 특공대원들을 뒤따라 나갔다. 그런데 보트 5대가운데 4대가 적의 총탄과 기관고장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함명수 소령은 특공대원들을 독려하면서 계속 전진하던 중 상륙지점 수십미터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더 이상 특공대원들이 전진할 수 없었고, 모두가 전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냥 배버려두면 특공대원들이 적전에서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상황이었다. 공정식소령은 위기를 타개하기위해 302정을 지휘하여 필사적으로 37밀리 포를 발사하면서 함명수소령이 ㅡ러진 보트로 발려갔다. 함명수소령은 양쪽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보트위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공정식소령은 지체없이 동기생 함명수소령을 구출, 단정을 이용하여 충무공정으로 이송토록하고, 곧바로 37밀리 포를 발사하면서 몽금포항내를 돌진해 들어갔다. 우선 부두에 계류중인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또는 대파시켜 적의 전의를 상실시키고, 끝까지 저항하는 적 경비적 한 척에 대해서는 수류탄을 투척한 후 승선하여 육탄전으로 인민군장교등 승조원 5명은 생포하고 경비정을 나포했다. 302정은 전투중 적이 발사한 총탄으로 함수와 양쪽 현측이 파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 포로를 결박하고 나포한 적 경비정을 예인하여 8월 18일 인천항으로 끌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