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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인간생활에 있어서 전쟁보다 더한 환란이 없고 전쟁에서도 동족상잔보다 더 비참한 전쟁이 없다면 저 6.25동란은 그 규모로 보나 가영성으로 보나 인류사상에서도 유례없는 일대비극이 아닐수없다. 동족 가운데에서도 우리 한민족은 단일 민족일뿐 아니라,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빈번한 외적들의 침노에 함께 시달리며 함께 빗밟히며 함께 신음하여 함께 피 흘리며 함께 죽어가며 함께 싸우며 함께 물리치며 함께 일어나곤 했던 유별난 동족이요 유별난 형제가 아니던가. 한스럽다. 공산주의가 무엇이더냐. 8.15를 맞아하여 형제가 한데 뭉치어 복스럽게 잘살줄 알아더니, 자의 아닌 타의로 국토는 어리가 잘라지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지니 분단도 서룬데다 공산주의로 얼이 빠진 형제 아닌 괴뢰들이 총과 칼과 탱크와 비행기로 삼팔선을 넘어온 그때가 바로 6월 25일 미명, 이것이 6.25동란의 시초다. 3.8선 인접지에 피로 물들이지 않은 곳이 어디랴마는 우리 홍천은 전투상의 요충지였던 만큼 그 격전 또한 필설로 헤아릴 수 없으니, 1950년 12월 13일부터 같은 51년 5월 20일까지 약 반년간에 걸쳐 이 지역에 투입된 적군은 북괴군 제6, 제11, 제12, 제45의 4개 사단에다 중공군 제63군이 이에 가담했으며 아군은 국군 제3, 제5, 제8의 3개사단과, 미해병 제1사단과 카나다 뉴질랜드 부대가 각각 유엔군으로서 적을 격퇴하는데 합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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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에서 적의 대군은 시산혈하를 이루고 남은 자들이 겨우 물러갔거니와 아군의 손실도 적지않아, 본군출신의 전사자만해도 군경이 468위 대한청년단원이 287위라는 희생자를 낳았다. 특히 강원도하고도 순박하고 정의감이 강하기로 이름있는 홍천군의 의협남아들이 당시의 대한청년단에 집결되어, 6.25동란을 전후하여 국가 민족과 자유의 깃발아래 용전감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길이 빛나는 한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이들은 6.25가 발발하기 약 1년전인, 49년 7월에 이미 이북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하자 대한청년단원 약 4000여명이 국군 제7연대를 도와 몽둥이와 돌맹이로 적을 격퇴했고 동란이 발발하기 두달전인 50년 4월에는 화촌면 야시대리에 침투한 공비를 백병전으로 맞아 싸워 섬멸했고, 50년 7월에 남면 사동리에서는 공산분자와 북괴잔당이 합세하여 난동을 일으키자 역시 몽둥이와 맨주먹으로 이를 타도했고, 50년 8월에는 동면 노천리 화방에서 공산잔당의 난동을 제압하는등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고을 젊은이들의 피끓는 정의감과 자유에 대한 목마른 정열은 이 지역에 준동하는 공산잔당을 계속 타도 봉쇄하였고, 다시 나아가 자유세계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위하여 월남까지 출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받친이도 허다하니, 장하다 이 고을 젊은 넋들이여. 조국은 그대들의 의로운 피에서 기필코 통일 될것이며 자유를 지킬것이다. 여기 조국 자유과 자유를 위하여 쓰러진 드대들의 의로운 넋을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돌을 세우니 그대들은 부디 눈감고 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