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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의산 전적지 봉의산은 춘천의 진산으로 춘천분지를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 지형임과 동시에 봉의산성이 산봉우리를 둘러싼 천혜의 요새이다. 고려시대때는 건란군과 몽골군의 내침에 의연히 맞서 싸우다 춘천군민들이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던 역사적 장소이며, 6.25전쟁 초기에는 6사단 7연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하여 춘천지구전투를 지휘했던 전적지이다. 1950년 6월 25일 적이 기습남침을 개시해 오자 춘천지구 방어책임을 맡은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우두산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의 끊임없는 포격을 받았기 때문에 6월 25일 16:00시경 16포병대대 관측소와 함께 이곳 봉의산으로 전술지휘소를 옮겼고, 6월 26일에는 6사단장 김종오대령도 원주에서 춘천으로 이동하여 봉의산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함으로서 통합적인 지휘가 가능했다. 6월 26일 오전부터 봉의산의 지휘소와 포병관측소 일대에 적포탄이 떨어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전투지휘를 하여 10:30분에 옥산포 파쇄공격을 실시하였고, 14:00시경부터 옥산포~소양강 방향으로 공격해 오는 적에 대하여 정확한 포격을 퍼부어 격퇴시켰다. 특히 옥산포 남방 보리밭일대에서 산개하여 남하하는 적 보병부대는 16포병대대의 사격에 거의 전멸하였다. 그러나 중앙이 돌출된 상태(164고지에 7연대 1대대 배치, 우두산에 19연대 2대대 배치)에서 방어하는 것이 불리함으로 소양강 남단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를 계속하려고 부대배치를 재조정하였다. 이 때 적의 재 공격에 대비하여 소양교를 폭파하자는 공병중대장의 건의를 전 전선의 상황을 파악 할 수 없었던 6사단장은 재반격 때 사용할 생각으로 폭파를 보류시켰다. 소양교 폭파를 보류한 조치는 그 후 두고두고 한이 되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6월 27일 아침부터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봉의산 우측~후평동 일대로 재배치된 7연대 1대대는 08:00시경 우두동의 소양강 여울에서 도섭해 오는 적 보병 2개중대에 대하여 기관총, 박격포, 대전차포 사격을 집중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소양교 방향으로 공격해오는 적은 봉의산과 춘천시내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은 후 08:00시경부터 소양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양교 남단 봉의산 기슭에 배치된 공병중대가 정확한 사격을 가해 모두 사살되었고, 그 후 몇 차례 반복 공격을 해 올 때마다 모두 사살되어 적의 시체가 소양교위에 가득히 쌓였다. 몇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적은 최후 수단으로 11:00시경 T-34전차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해 왔다. 적 전차는 소양교위에 널려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궤도로 깔아 뭉래며 소양교를 건오오기 시작했다. 적 전차가 소양교 중간지점에 도달 했을 때 아군의 대전차포 사격을 가해 명중시켰으나 파괴되지 않았고, 공병중대에서 폭파 스위치를 눌렀으나 폭약 연결선이 적 포격에 의해 절단되 있어 소양교 폭파에 실패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 때 육군본부와 6사단장과의 통신이 연결되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이 무너졌다는 비보를 들었고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래서 6사단장은 소양강 남단에서 방어하는 부대에게 원창고개에 제2방어선을 구축하도롤 명령했고, 7연대 지휘소와 사단 전술지휘소도 이동하였다. 치열한 전투끝에 춘천시 일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6월 27일 18:00시경이었다. 그러나 6사단은 3일간이나 춘천을 방어하였고, 춘천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빈약한 무기와 열세한 병력(1:4)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전과(1:7)을 올렸고, 적 2군단장과 2사단장은 춘천전투 직후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되었다. 이는 6사단만의 승리가 아니라 진지구축을 지원하고 전투시 포탄을 운반해준 춘천시민과 학생들의 승리이기도 하다. 아! 60년전 6사단 7연대와 16포병대대가 적을 향해 쏘아대던 총성과 포성은 지금 승리의 함성으로 변하여 이곳 봉의산에 울려 퍼지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