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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면암 윤원세 선생은 1890년 11월 7일 의정부시 금오동 84번지 향리에서 파평윤문 경준씨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시어 소년시절부터 부모님께 효심이 극진하고 성품이 강직하셨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함흑기 난국의 일제 치하가 시작되자 선생은 망국의 한을 농촌계몽운동과 진흥사업에 불살라 부업장려와 절미운동 부녀자들의 물산장려와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당 개설 등 민족의 거울로 흠모받아 부족함이 없게 농촌운동에 정진하셨다. 1919년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 민족의 함성이 전국을 흔들며 선생은 나이 29세로 기미독립운동 대열의 선봉에 서서 그해 3월 15일 금오리를 거점으로 이윤의 씨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 의정부를 휩쓸었으니 그 용기와 애국심은 왜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계속되는 항일독립운동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라 하겠고 그 시대의 사표라 할 수 있다. 또 1936년 8월 선생은 천도교 양주교구장 자격으로 황해도 은율에서 가진 전국 멸왜기도집회에서 독립운동 자금모금책의 중임의 밀명을 받고 활동하시었고 다음해 2월 17일 황해도 신천에서 천도교구장 대표특별기도회에 참석 암약하다 발각되어 왜경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이른바 무인 멸왜 기도사건으로 신천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시니 옥중에서 왜경의 가혹한 고문을 당하시면서도 초지일관 굽힘없이 심한 고문때마다 큰소리로 멸왜기도문을 외쳐 왜경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게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939년 봄 극심한 고문으로 신병을 얻어 출옥은 되었으나 동년 5월 2일 혹독한 장독을 못 이겨 순절하시니 향년 49세 나이로 일생을 마치셨다. 젊어서는 농촌민중계몽과 물산장려의 애향운동 그리고 장년에는 천도교인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항일독립투사로 투쟁해 온 애국일념과 드높은 기상과 굳은 절개는 낮은 듯 하지만 진정 높은 거상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높은 성품과 넓은 포부 깨끗한 정신은 우국의 지사로서 후인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자 창현 중현, 손 한홍 한성 상훈 정훈 1995년 12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