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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화공원의 고 정경화 대위(1992년 9월 5일 소령으로 추서진급)는 육군사관학교 제27기로 1976년 보병 제7사단 제5연대 제3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재직하였다. 그는 평소 강직한 성품으로 중대원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이곳 백암산 기슭에서 생활해 왔다. 훈련장에서는 성난 호랑이 같았고, 내무반에서는 자상한 형님같아서 중대원들의 의지와 존중을 받았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에 당시 3중대는 GOP근무를 명 받아 경계근무를 하던 중 북한군 땅굴작업의 기미를 포착했다는 상급부대의 명령에 따라 당시 1977년 6월 21일 정경화 대위는 중대원 22명과 함께 경계지역 비무장지대의 수색정찰 및 지뢰제거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중대원들이 지뢰를 발견하면 중대원들을 대피시키고 난 후에 중대장이 단신으로 제거하기를 반복하다가 스물세발째 지뢰를 제거하던 도중 안전핀이 부식되어(6.25당시 매설된 것으로 추정)부러진 탓에 급히 중대원을 향해 피하라는 한마디 말을 남긴채 자신의 몸으로 지뢰를 덮쳐 부하대원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심하게 부상당한 중대장은 후송도중에 장렬히 순직하였고, 그 위패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27동 2733호)에 안장되었다. 중대원들은 중대장을 잃은 슬픔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전역을 한 후에도 중대장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고 국립묘지를 참배해 오던 중, 당시 중대원들의 모임인 백암산 패밀리(舊 맹호회)를 결성하여 추모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1988년 2월에는 중대원인 정문식이 중대장과의 병영생활을 토대로 한, 그 일화를 집필하여 “백암산 접동새(그때 그곳 그 자리 에)”라는 추모의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판매대금과 중대원,육사 27기 동기회, 칠성부대 등의 협력을 얻어 고인이 생활하던 백암산 기슭에 1988년 12월 18일 당시 중대원들과 가족, 후배 장병들의 축하 속에서 11년만에 다시 중대장의 모습을 동상으로나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도 백암산 패밀리(舊 맹호회)는 중대장 추모사업 일환으로 추도식행사는 물론 전방부대의 각종 위문행사를 주도해 왔는데, 이 모임에 대한 이야기들이 각종 매스컴에 소개되었고, 중대장의 일화를 EBS 교육방송과 국군영화 제작소(배달의 기수)에서 제작된 바 있다. 또 백암산 패밀리는 뒤늦게 중대장의 죽음이 안전사고로 인한 단순 순직으로 육군본부 전사망처리부에 보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백암산 패밀리(회장 정문식)는 늦게라도 이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 중대장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국방부와 육본에 수차례 당시의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요구하는 탄원을 한 바, 그 해 7월 육군본부의 육군합동 수사본부는 재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에 조사단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당시 중대원 정문식(백암산 패밀리 회장)을 비롯 이종현, 신완호, 강희영, 최제용, 박노영 등의 현장 증언과 당시의 물증을 토대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육군본부에서는 이를 작전 도중 부하를 위한 희생으로 인정하여 고인이 순국한지 15년만에 일계급 특진(추서진급)명령(국방부 인사명령 장교 제294호)이 백암산 패밀리 앞으로 나오게 되었고, 국립묘지의 묘비도 대위에서 소령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듯 중대장 추모사업에 결실을 맺은 백암산 패밀리는 이곳에서 정경화 대위가 순국한지 15년 만인 1992년 10월 22일에 중대장 동상앞에서 또 다시 군당국과 각계각층의 많은 추모객들이함게 자리한 가운데 엄숙하면서도 성대한 추서 진급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중대장의 숭고한 정신을 잇고자 했던 부하대원들의 투철한 의협심과 끈끈한 전우애를 엿볼 수 있는 일로 한국군 창설이래 최초의 일이었으며, 이 아름답고 흐믓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후배 장병들의 정신교육과 정서함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투철한 안보의식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되었는데, 바로 백암산의 정기를 이은 칠성부대의 자랑이며 명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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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 href=http://blog.daum.net/kieury/11294588 target=_blank>부하대원을 구해내고 백암산자락에서 산화한 "정경화 대위"</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