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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인생 - 중반부 / Life of Sim Hun (Middle Phase) ◆ 1920~1924 : 좌절과 극복 - ◆ 1925~1927 : 문학인 그리고 영화인 〈좌절과 극복〉 1920년, 중국으로 망명 유학길을 떠나, 여러 우국지사들과 수개월간 교우하며 1921년 북경에서 상해, 남경 등을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 수학하기도 하였다. 특히 심훈은 우당 이회영의 집에서 2개월여를 지냈는데, 이회영은 1930년대 초반까지 국내 및 만주와 중국본토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민족주의와 학구열이 왕성한 19세의 심훈과 인격과 학식을 갖추고 민족독립운동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53세의 완숙한 경지에 달한 우당 이회영과의 만남은 훗날 심훈이 민족적 애국주의 시와 농민소설을 집필하는데 중요한 사상적 토양이 되었으리라 보인다. 〈문학인 그리고 영화인〉 1923년, 중국에서 지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이해영과 이혼하고 〈미인의 恨(한)〉이란 외국 장편소설의 후반부를 번안하여 연재하였고, 영화 〈장한몽 長恨夢〉 주역인 이수일(李守一)역의 후반부를 대역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서 34회에 걸쳐 연재를 하였다. 1927년 마침내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원작·각색·감독하여 단성사에 개봉하였는데 이 영화는 당시 〈아리랑〉 에 이어 한국영화 개척기의 또 하나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졌다. 〈먼동이 틀 때〉는 매우 사실적이고도 인물의 묘사가 극명(克明)하여 무성영화시대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심훈은 수많은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을 많이 남겼지만 직접 감독한 작품은 아쉽게도 「먼동이 틀 때」 한 편으로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