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page


337page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1950년 6월28일 새벽, 서울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피란길에 나선 서울 시민들은 깜깜한 어둠을 뚫고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로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6·25전쟁 무렵 한강에는 단선 철교 하나와 복선 철교 두 개, 그리고 한강 인도교와 광진교 등 다리가 모두 5개 있었다. 그중 인도교는 서울 시민이 도심에서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피란민 4000여 명과 피란 도구를 실은 소달구지, 군인 차가 뒤엉켜 한 발짝 떼기도 힘들던 새벽 2시30분 무렵,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인도교가 두 동강 나고 그 위에 있던 사람과 차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커먼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승만과 군 수뇌부가 북한군의 도강 위험 요소를 미리 없애겠다며 TNT 3600파운드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현장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그 목격담들이다. “윤 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 현장까지 들어가 보니 북쪽 두 번째 아치가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많던 차량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인의 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는 피바다를 이루고 있고 그 위에 살점 등이 엉켜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피란민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긁으며 죽기 전 본능인 듯 저마다 ‘어머니’를 외치고 있었다(국방부 정훈국 정훈과 이창록 소위 증언).” “중앙청 앞을 지나 용산 한강 인도교에 이르는 동안 길 가득히 메운 민간 차량과 군용 차량은 흡사 홍수였다. 겨우 인도교를 지나 선두가 노량진 수원지 정문에 이르렀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밤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시계를 보니 오전 2시32분, 단 2분이라는 시차로 우리 부대는 죽을 고비 하나를 넘었다(국군 16연대 부연대장 이원장의 증언).” “미국 기자 3명은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맨 앞에서 다리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뒤에는 4000명 이상의 피란민과 군인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 (새벽) 2시30분경 오렌지빛 불이 캄캄한 하늘에 번쩍이고 땅이 뒤흔들렸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리 남쪽 두 개의 긴 아치가 출렁대는 시커먼 물속으로 떨어졌다. 최소한 500명 내지 800명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다리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폭파 전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었다(〈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의 저자, 로이 애플먼).” 바로 그 시각,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의 충남지사 관저에 머물며 미리 녹음해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 전날(6월27일) 새벽, 이승만 정부는 중앙청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정부 기능을 수원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서울 시민의 안전문제에 대한 언급이나 계획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 이승만은 6월27일 새벽 2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같은 날 오후 2시, 국군 참모장(현 육참총장) 채병덕은 다음 날(6월28일) 새벽 2시에 각각 서울을 떠났다. 특히 채병덕은 자신이 탄 지프차가 한강 인도교를 넘은 뒤 공병감 최창식에게 무전으로 ‘곧바로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시 강북 지역엔 4만여 명의 국군 병력은 물론 1316대의 군용 차량과 막대한 보급품 등 전쟁물자가 남아 있었다. 다리가 폭파되면서 장비와 물자는 모두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평화재향군인회 김기준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이승만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의 산물이다. 혼자서만 도망할 게 아니라 6월27일에 대피 명령만 내렸더라도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당시에 사람들이 건널 수 있던 다리는 한강 인도교 하나뿐이었다. 한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인도교 못지않게 나룻배가 많이 쓰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다리를 폭파하더라도 사전에 예고했다면 수백 명이 다리에서 비명횡사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개전 초기 이승만의 육성 녹음을 통한 거짓 방송과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나 다름없었다. 서울 시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피란 가려 했을 때는 한강 교량 다수가 파괴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더욱 황당한 일은, 이승만과 최측근 몇 명만 미리 서울을 빠져나갔을 뿐 부통령 이시영 같은 정부 고위 인사들조차 대통령이 달아났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부통령 이시영의 경우 북측에서 보낸 밀사가 접선을 시도하여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부통령 선생께서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승계하신 거 아닙니까? 김일성 수상이 정상회담을 원하니 저랑 같이 갑시다”라는 제안을 받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북한 밀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바로 피란길에 올라 한강 인도교 폭파 직전인 6월28일 새벽 1시쯤에 노량진 땅을 밟았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한강 인도교 폭파로 수많은 정부 고위 인사, 국회의원, 서울 시민 대부분은 한강 이북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김규식·조소앙·안재홍 등 상당수 정부 지도층 인사들이 납북되었다. 운 좋게 피신한 사람들은 훗날 서울 수복 이후에 이승만 세력으로부터 ‘북한의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고초를 당했다.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를 두고 여론은 물론 군대 내에서도 책임론이 비등했다. 당시 국군 2, 3, 5, 7사단과 수방사 부대는 서울 외곽 방어선 곳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4만여 명에 이르는 국군 잔류 병력은 아군에 의한 한강 교량 파괴 소식을 듣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전투장비와 차량 등 물자를 두고 달아나기 바빴다. 뒷날 미군을 따라 한국전쟁을 참관한 일본 육상자위대 간부학교 전사교관들의 ‘육전사 보급회’는 이승만 군 수뇌부의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군 주력은 (북한) 인민군에 밀리면서 스스로 자신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결정적인 자멸 요인을 만들었다. 한강 다리 조기 폭파 후 한국군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붕괴하고 말았다.”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군 안팎의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폭파 책임자로 지목해 ‘적전 비행죄’로 군법회의에 회부한다. 전쟁이 터진 지 3개월쯤 뒤인 1950년 9월21일 최 대령에 대한 총살형을 집행했다. 최 대령 처형 후 이승만 정부는 단 한 차례도 이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언급조차 금기시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되고 이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사형당한 최창식 공병감의 부인이 억울하다며 군에 재심을 신청했다. 재심 결과 육군보통군법회의는 1964년 최창식에게 사후 14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박정희 군부는 이번엔 최창식에게 폭파를 지시한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출처 :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