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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개요 한강방어선전투는 6.25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부터 7월 3일까지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소장) 예하의 3개 혼성사단및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한강 남쪽및 김포지역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보병 4개사단 및 전차 1개여단의 한강도하를 6일간이나 저지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는 서울이 함락되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한강방어선을 6일간이나 지탱해 전쟁초기 남진을 계속하려던 북한군의 남침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웠다. 나아가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함은 물론이고, 이후 국군 재편성과 한미연합작전을 가능케 함으로써 북한군에게 새로운 전쟁을 강요한 6.25전쟁사에서 성공적인 작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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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과및 결과.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3일만인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맞서 국군은 한강이남으로 철수한 병력과 김포지역에서 방어를 실시하고 있는 부대를 규합하여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 천혜의 장애물인 한강을 이용하여 오늘날 양화교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24km구역및 김포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한강도하및 영등포진출을 저지했다. 한강 이남에서는 혼성 수도사단, 혼성제7사단, 혼성 제2사단등이 각각 연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한 병력이었지만, 여의도 비행장을 포함한 영등포, 노량진, 신사리에 이르는 한강남쪽강변을 나누어 맡아 북한군 제3,4사단및 제1사단(예비), 전차1개여단등의 남진을 저지했다. 김포지역에서는 김포지구사령부가 북한국 제6사단의 영등포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6월 29일 여의도 앞 밤섬을 장악한 북한군은 본격적인 한강도하를 위해 흑석동, 여의도, 신사리일대에 탐색전을 전개했다. 이날 더글라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이 한강방어선을 직접 방문하여 전황을 살리고 국군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6월 30일 북한군은 신사리~말죽거리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했고, 김포지역에서는 김포비행장을 놓고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7월 1일 북한군이 영의도, 영등포지역으로 도하를 감행하자 노량진과 여의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 배운용소령, 유상재중위등이 희생되는 혈전 끝에 그들을 저지시켰다. 7월 2일 국군은 영등포폭격으로 적 전차의 도하기도를 저지시키는데는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결국 7월 3일 경부선 철교를 통해 북한군 전차가 노량진 및 영등포로 진출하면서, 국군은 한강방어선및 김포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6일동안 북한군의 한강도하및 영등포진출을 지연시킴으로서, 구군은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학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