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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 여는글 1950년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이 유엔을 통과하면서 6·25전쟁은 남북한 간의 군사 력 충돌을 넘어 국제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었다. 유엔 결의안 통과 직후 가장 신속하게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것은 유엔군의 주축을 이루었던 미국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국가들의 기여와 노력이 없었다면 6·25전쟁은 단순한 동·서 대립의 대리전 성격을 넘어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엔군이 구성됨으로써 6·25전쟁은 단순한 몇몇 공산권 국가들과 한·미의 대결이 아니라, 공산침략자들과 자유수호를 위한 자유세계의 전쟁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약 3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영국은 2개 보병여단과 군함 17척을 파견하는 등 연인원 5만 6,000명을 파병하였다. 프랑스(연인원 3,421명), 네덜란드(연인원 5,322명), 벨기에(3,498명), 룩셈부르크(83명), 그리스(4,992명), 터키(1만 4,936명), 캐나다(2만 5,687명), 콜롬비아(5,100명), 필리핀(7,420명), 호주(8,407명), 뉴질랜드(3,794명), 태국(6,326명), 에티오피아(3,518명), 남아프리카공화국(826명) 등 각각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투병력을 한국에 파견하였고,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인 도 등 5개국은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미국을 포함한 참전 16개국과 의료단 파견 국가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아시아가 3개국, 유럽이 11개국(터키 포함), 북아메리카 2개국, 남아메리카 1개국, 오세아니아 2개국, 아프리카 2개국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지역적 분포는 상징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6·25전쟁에서 한국을 지원한 21개국은 전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다양한 지역에서 파견된 유엔 군이 6·25전쟁에 동참함으로써 유엔은 1948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한국의 붕괴를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집단안보 노력을 통해 북한과 그 배후세력들의 기도를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의지 를 분명히 했다. 물론 당시의 혼란된 상황 하에서 일반 한국인들은 어떤 국가가 얼마만큼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는 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와 민족, 문화적 차이를 지닌 각국으로부터의 지원 병력을 접하고 경험하는 동안 한국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견뎌내 고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유엔군의 참전은 상징성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을 결정적 위기에서 구해냈다. 창군 이후 대내외적인 여건상 치안유지 수준의 군사력만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군은 전쟁을 버텨내기에는 너무 취약했고, 장비 면에서도 열악했다. 누가 보더라도 전쟁의 무게중심이 압도적인 북한의 우세로 기운 상황에서 유엔군의 참전은 전세 역전의 전기를 제공하였다.‘스미스 특수임무부대’에 이어 미 제24사단 본진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국의 참 전이 본격화되었고, 이미 6월 27일 결의 직후 해군력을 한반도 해역에 파견하였던 영국 역시 지상군 파병을 시작하였다. 유엔군 구성에 대한 결의안 통과는 한국에 대해 실질적인 군사원조를 주저하던 여타의 회원국들을 독려하였고, 그 결과 1950년 7월 7일 이후 유엔군에 대한 회원국들의 병력 파견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7월 5일 미군이 북한과의 최초 전투를 경험하였고, 9월 이후에는 영국군이 지상전투에 투입되었다. 12월에는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의 위기에서 프랑스군이 투지를 발휘했다. 이처럼 유엔군은 전쟁 초기의 절망적 상황에서 의기소침해지고 피로한 한국군의 용기를 북돋웠고, 낙동강 전선을 한국군과 함께 지켜내었으며 9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 역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공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투명해진 시점에서도 유엔군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많은 희생을 견뎌냈다. 6·25전쟁을 통해 유엔 참전국들은 거의 예외 없이 파견한 연인원의 30퍼센트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었다. 14만 명에 이르는 미군이 전쟁에서 희생을 치렀고, 그 중 전사자만 3만 7,000명 가량에 이르렀다. 4,900여 명이 사상한 영국, 1,280여 명의 희생을 치른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에서는 유엔군 참전을 냉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유엔의 결의 형식을 취했지만, 많은 참전국들이 미국의 영향력 때문에 병력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압력에 의해 등 떠밀려 참전했다면 전쟁이 치열한 영토 확보 양상으로 변화된 1951년 이후에 유엔군이 보여준 믿기 6대륙 21개국 194만 명 우리의 역사 속에 기억될 이름들 1953년 영연방 여단에 소속된 호주 3대대 병력의 차량 탑승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