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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기미년 3월 1일 정오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동시에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천지가 진동하고 성난 군중들의 절규와 더불어 독립선언문을 살포 태극기를 흔들며 세계만방에 독립의지를 널리 떨치는 시위군중의 선봉에 서서 의연하고 용맹스런 모습으로 미국 영사관으로 유도하는 한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18세 보성고보 3학년생 군산 임피 출신 이인식 선생님이셨다. 애국지사 춘고(春皐) 李仁植 先生은 1901년 10월 22일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읍내 당시 옥구지방의 만석부호인 이태하씨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총명하고 영리한 수재로 자라면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임피초등학교가 개교되자 입학 2회로 졸업하고 16세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보성고보에 입학하여 어려운 학우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과 의로운 선행을 베푸는 적덕인으로 추앙받던 그때에,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원칙이 세계만방에 알려지니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용기를 주어 차제에 조국독립을 쟁취할 뜻을 굳게 하여 젊은 학도들의 가슴에 끓는 피가 용솟음쳐 보성고보의 3학년인 이인식선생은 배달민족의 엘리트들인 연희전문 김원벽, 보성전문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의 한위건등과 학생 투쟁대열에 전북대표 및 보성고보생으로 3·1 독립만세 주체인 손병희 선생등 33인 휘하에서 미국영사관 연락담당을 맡고 2월 28일 저녁 서울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댁에서 3·1 독립운동의 실행을 숙의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백절불굴의 의지로써 정진할 것을 결의하고, 마침내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 태화관에서 33인의 3·1 독립선언문 발표와 때를 같이 하여 독립선언문 낭독 후 대한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 속에 시위 군중들을 미국 영사관 쪽으로 유도 독립선언문 살포 등 행동적 레지스탕스로서 연일 서울역 남대문등 지역에서 맹활약하셨고, 3월 5일 밤 서울 종로 송현동 62번지 이인식선생의 자택에서 각 전문대 대표 및 고보생 대표 63명이 그간의 투쟁내용의 평가와 사후 대책 등 발전적 토의를 하는 등 3·1 독립운동 학생 중심세력으로 활동하던 차 일경에 대다수인 43명이 체포 구속되어 선생은 10개월 형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수많은 옥중 독립투사들로부터 해외활동 상황과 독립운동 자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2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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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에는 당시 이인식선생의 활동에 대하여 “그가 고보생으로서 당시 연희 보성 경성의학전문대 학생들과 독립운동에 대한 숙의를 함으로써 그의 높은 정신 연령을 보였으며 오직 조국의 독립 앞에 몸과 마음을 던질 수 있었던 대인적 긍지가 항시 이인식의 몸에서 불타고 있었다.”라고 기록 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선생님은 사선을 넘나들며 젊음을 불태울 각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1920년 출감 후 일경의 감시를 피해가며 부모로부터 상속 받은 전 재산을 정리하여 머슴인 벙어리 삼복이의 도움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당시로선 거금인 8천원을 헌납하신바 있으며, (임피, 서수, 나포, 성산등 대지 4,646평 밭18,667평 논 223,161평등 총246,474평을 1920년 출옥 후 바로 처분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함) 1923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 재 일본한국인 학생 항일결사의 일원으로 금우회(錦友會)를 조직 월보 등을 발간 항일운동 거사를 도모하다 일경에 발각되어 일부가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시고, 1926년 6·10만세 사건 때 비밀리 국내에 잠입, 거사활동, 정보수집, 군자금 조달 등 암약하시다가 상해, 장춘, 용정, 목단강등 동만주 지역에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로서의 맹렬한 활동으로 암울했던 민족의 수난기에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신 성인 정신으로 질주하던 격랑의 세월을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으로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바쳐 그렇게도 강렬하게 염원했던 조국 광복을 맞아 환희의 기쁨을 안고 환국하셨건만, 그러나 저마다 권력쟁취에 혼란스런 조국의 모습을 개탄하며 그들과 부화뇌동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고향의 영재를 육성하겠다는 결심에 학교운영의 어려움이 많았던 임피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셔서 6.25전쟁이후 많은 이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그 시절“배워야한다. 그래야 사람 노릇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희망마저 버려진 서수, 임피, 나포, 오산, 함라, 웅포면의 모든 마을 소년 소녀들의 가정에 방문하여 손목을 잡아 이끌어 배움의 기회를 주시면서 근학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하고 손수 약재를 재배, 한약을 만들어 학비를 지원해 주시고 선생님께서는 기숙 할 곳조차 없어 학교 숙직실에 기거 하시면서도 박봉을 덜어 학비를 보태 주시며 졸업과 진학을 주선하시여 그 많은 제자들이 오늘의 국가 간성으로서 4성 장군인 육군대장 등 훌륭한 공직자, 법조인, 학자, 기술사, 사업가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셨으니 이 어찌 독립운동가로서 시대의 선구자요, 교육자로서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받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의 이기주의적 세태와 교육적 부패가 만연한 현실을 보면서 이인식 선생의 애국 애족의 3·1 독립만세운동정신을 함양하므로써 민족혼을 고취하고 숭고한 교육 정신을 널리 펼쳐 자라나는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살신성인의 열정적 독립운동의 혼과 헌신적 후진양성의 교육정신을 불어 넣어 여기에 춘고 이인식 선생의 동상을 세워 우리들의 후손에게 그 위대한 업적의 기록을 천추만대에 보존하고 전하려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