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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아들은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못된 아 들은 조국을 위해, 어머니를 위해 ‘신화를 남긴’ 그날의 ‘월남(越南)’으 로 향했던 것이다. 가난함이 빠듯한 삶에 맞물려 따듯한 밥 한 끼 차 려주지 못하고 보냈던 게 한이 된다던 할머니. ‘그게 한이 된다오. 쌀은 없어도 고구마는 장사를 했으니 이거라도 삶 아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는데….’ 어머니 ‘시간 없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더라고…. 그게 끝이었지. 그땐 그랬어. 보리밥하나 못 먹이는 게 어찌나 죄스럽던지 목이 메 부르지 도 못하겠더라고.’ 울지 마세요. ‘그 때 다리라도 붙들고 이 고구마 하나 못 먹여 보낸 것이 아직도 내 마음에 못이 되었다네.….’ 못난 아들. 용서하세요. 긴 한숨에 눈을 감았다. 기억은 과거로 스며지고 과거는 곧 후회로 날 아든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챙겨주신 흰 봉투가 떠올랐다. 넉넉한 살림살 이가 아닌 걸 알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주머니 속에 구겨 넣 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가까운 스쳐짐만 고르던 내 시선의 차 가운 숨결도 이제는 먼 산들에 차분히 어울린다. 푸르른 하늘. 문득 어렸을 적 어머니 손잡고 뒷동산 쑥 캐러갔을 때가 떠올랐다. 소소한 풀내음. 부모의 품이 선물해준 옛 추억에 젖는 일이야말로 이렇게 평 온한 것이다. 마음이 한가로워 한가득 쌓여있던 방귀가 소리 없이 스 르르 새어 나온다. 시원하다. 창문을 조금 열어 바람을 맞아본다. 꽉 막혀있던 ‘무엇’인가 고구마 냄새와 함께 사라져 간다. 지갑 속에서 꼬깃한 종이를 한 장 꺼낸다. 훈련소 들어가던 길. 어머니가 나에게 쥐어준 편지. ‘사랑하는 내 아들아 언제나 어린 철부지 내 새끼로만 내 곁에 있을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 나라의 부름을 받아 씩씩한 군 인이 되었구나. 인내는 배우되 숨겨 아파하지 말거라. 용맹함을 기르되 독해 쓸쓸해 지지 말거라. 전우는 깊이 사귀되 적을 두지 말거라. 전투에 이기는 법을 익히되 전사로 용서 받지 말거라. 어미를 버리되 조국을 버리지 말거라. 꼭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 되어 돌아오너라. 언제나 너를 믿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멋진 아들에게’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59 vol. 37 story 초록(草綠)이 좋다던 여자여. 해지면 불 밝혀 게 잡던 손이여 운다. 이 여자 운다. 내가 보여 일렁이는가. 애자지정(愛子之情) 아니다. 그저 눈엽에 부시다 하겠지 아니다. 이 여자 운다. 여자라 운다. 저 멀리 억센 풀, 달래란 걸 알기에 가슴으로 운다. 나도 그리고 어머니도. “이보게 젊은이 혹시 군인이오?” 어느새 비어있던 옆 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귀대하는 길이지?” “아 네…” 매가리 없는 소리에 할머니께선 말없이 웃으시며 내 손에 직접 깐 고구마를 쥐어 주셨다. “씩씩한 청년이구만 추운데서 고생이 많을 텐데” “아닙니다.” “하이고! 키도 크고 얼굴도 미남이고 이렇게 듬직한 아들래미 둔 어머니는 참 좋으시겠네 그려” 제 자식인 듯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따듯한 관심에 나도 모르 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콜록 콜록!” 그렇게 고구마에 목도 마음도 메여 왔다. ‘호걸이 되어 만 천하에 너의 큰 뜻을 이루고. 그것을 새기어 훗날 너의 자식을 낳아라. 그리고 그때 다시 어미의 품으로 돌아 오거라.‘ 할머니가 내리시자 내 쓸쓸한 귀영(歸營) 길은 제법 따듯한 온기를 머금었다. 마치 어렸을 적 어머니가 차려주신 ‘호박 된장국’을 먹은 뒤 찾아오는 평온함과 같은 것이라. 불량식품으로 껄끄러워진 속을 어루만져주던 그 작지만 큰 손길이 떠올랐다. 두렵지 않았고 외롭지 않았다. 어머니의 깊은 손이었기에 잠들 수 있었고, 꿈꿀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할머니께도 아들이 있었다. 늦가을. 추위가 슬슬 기승을 부릴 때. 마치 오늘과 같은 날. 나와 같이 귀영 길에 올랐을 철없던 아 들을 떠올리고 계셨다. 짧게 자른 뻣뻣한 머리칼에 맞지도 않는 큰 군 복을 입고는 쭈뼛하게 서 있던 모습을. 그 ‘무엇’인가를 말하지 못한 채 고민하던 그 불안한 표정까지. 할머니께선 여전히 그날의 아들을 기억하고 계셨다. 아니 그리워하셨다. ‘난 내 자식을 믿었다우. 세상천지 다 빌어먹을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해도 내 눈엔 누구보다 늠름한 놈이었지.’ 펜끝의 향기 글 해병대제2사단 상병이지웅 어머니 낮 설고 물 설은 땅 포항. 내가 선택한 젊음의 소금밭이자 도전과 패기의 종착역. 열흘 간 단 잠 같은 첫 진급 휴가를 마치고 귀대(歸隊) 하는 이 열차 안, 긴 침묵의 시간은 분명 그 무엇보다 까다 로운 순간이자 내 마음속 작은 부산스러움일테지. 귀영 길, 없는 돈 자식새끼 고기라도 한 점 더 먹여 보내고 싶은 것이 어미의 마음이거늘 무엇이 그리 어수선하여 늘 볼통 거리기 일쑤였는지. 오늘 같은 날 어머니께 인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