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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컬렉션을 보여주면서 고태용과 브랜드의 정체성을 잡아야 하 죠. 이 사람 하면 딱 떠오르는 아이덴티티가 있어야죠. 클래식 하면 서 프레피를 가미하고 젊은 감성으로 위트 있게 표현한 디자이너. 그 런 아이템들을 만들어 나가야죠.” 하지만 그의 옷에는 분명 이미 색깔이 있고 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 이 있다. 옷 잘 입기로 유명한 영화배우 류승범씨도 그의 단골 고객 중 한 명이다. “승범이와는 동갑내기 친구인데 옷에 완전 환장한 애예요. 류승범이 나 봉태규 처럼 잘생기진 않아도 스타일리쉬한 친구들이 많이 오고 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런 친구들이 입으면 홍보효과도 크죠.” 하지만 정규과정을 완벽히 밟지 못한 이력 때문에 초창기 그의 옷은 형태는 훌륭하지만 세밀함에서 부족한 면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고작 30살을 넘긴 후배디자이너에게 기라성 같은 선배 디자이 너들이 해주는 얘기도 비슷하다. “선배님들이 처음엔 워낙 어린애가 들어오니까 별로 신경을 안 쓰다 가 이제는 컬렉션을 6번 연달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칭찬도 해주세 요.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재미있다고들 해주시죠. 클래식 속에 선배 님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젊은 느낌을 담아낸다는 거죠. 감각이 좋으 니까 숙련도를 많이 올리라는 조언도 해주시구요.” 그의 나이 이제 서른. 아직 갈 길이 멀다. 해외시장에서 옷은 팔고 있 지만, 그의 쇼를 해보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 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 있다. “지금 선배님들 나이인 마흔 살쯤 되면, 저는 훨씬 잘 되어 있겠죠. 일 찍 시작한 만큼 패션쇼를 30~40번을 했을 텐데 한국 대표디자이너 가 돼야 겠죠. 돼야 하고 될 수밖에 없어요. 어디 가서 표현은 안 하지 만 속으로는 남자가 해병대까지 다녀왔는데 최고가 돼야 한다는 생 각도 늘 하고 있고요.”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거라는 그는 아이덴티티가 녹아 있 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또 빼놓지 않았다. 손님은 단순히 예뻐서 옷을 사가는 것이지만, 디자이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녹 아든 작품을 파는 것이라는 얘기다. “2009년 F/W 쇼에서는 Homesick(향수병)을 주제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어요. 해병대라고 하면 흔히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나 딱딱한 제복의 이미지만 생각해요. 하지만 해병대에 오는 나이는 소년과 성 인의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는 여리고 감성적인 나이죠. 그래서 가장 강한 군대에 와 있지만 속으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감성을 표현했어요. 겉으로는 밀리터리 스타일의 형태나 견장 등으로 강한 이미지를 냈지만 내부는 모두 양털 소재로 포근하고 여린 양면적인 느낌을 줬어요.” 이 정도쯤 되면 ‘아. 이 사람. 정말 전문가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 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농담을 건네는 그는 서른이라 는 나이가 많게 느껴질 만큼 어려 보였지만,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빛은 노련한 사업가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옷에 대한 이야 기를 할 때만큼은 디자인에 한 평생을 바친 대가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에게 디자이너 를 꿈꾸는 후배 해병들을 위한 한 마디를 부탁했다. “흔히 ‘된다, 안 된다’를 갖고 고민을 많이 해요. 그러다 포기하는 애 들도 너무 많아요. 저도 천재가 아닌 이상 서울패션위크에 오를 수 있 을지 몰랐고, 브랜드를 내서 반응이 좋을지 안 좋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었어요. 하지만 전 믿음이 있었어요. 안 된다는 생각, 망한다는 생 각은 절대 안 했죠. 난 무조건 될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믿으니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거죠. 해병대에서 얻은 추진력과 자신감과 믿음. 그것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Vol. 37 Peoples 유명 백화점과 편집숍에 그의 옷들이 깔렸다. 작년부터는 뉴욕으로 도 그의 옷이 팔리기 시작했다. 미국 내 매장만 300개를 보유한 편집 숍 ‘얼반 아웃피터스’에도 그의 옷이 깔리기 시작했다. 특히, 디자이 너의 명성이 너무나 중요한 한국 시장에서 ‘꽃보다 남자’의 수식어는 큰 도움이 됐다. “미국에서는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몰라도 옷만 예쁘면 구매 해요. 하지 만 우리나라에선 같은 가격에 신인 디자이너의 옷이 더 예뻐도 유명 디 자이너의 옷을 사가요. 그런 면에선 ‘꽃보다 남자’가 많은 도움이 됐죠.” 남성들도 꾸미고 사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백화점 입점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지만 무난하게 자리를 잡아간다는 느 낌이 든다. 고민 없는 화려한 생활을 할 것 같았던 디자이너의 삶. 그 이면에 이처럼 치열한 돈과의 전쟁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는 화려하게만 생각했어요. 패션쇼에 다 니고 파티에 참석하고 유명 인사들과 친하게 지내고. 하지만 6개월 고생해서 쇼 때만 잠깐 멋있어 보이지 엄청 고생하는 직업이에요.” 떼돈을 벌며 화려하게 사는 줄 알았 던 선배 디자이너들도 알고 보니 버는 족족 쇼에 쏟아 붓는 본전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배들은 고 태용에게 일단 3년만 버티라고 했다. 매출이 있건 없건 3년을 버텨야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올해로 3년차가 끝나가니 이 정도면 훌륭히 버 텨내는 셈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텃세가 컸어요. 다들 젊은 디자이너를 육성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새로운 디자이너가 들어오는데 많은 거부반응이 있더라고요. 작은 한 국 시장에서 디자이너가 늘어나면 파이를 빼앗길 수 있다는 거죠. 서로 협력하고 발전해서 파이를 키우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죠.” 하지만 그런 텃세 역시 먹고 살기 힘든 디자이너들의 현실 때문이라 고 그는 이해한다. 직접 해보니 누굴 키울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자신이 힘든데 누굴 키우겠냐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래도 젊은 디자이너들 중에서는 빠르게 자리를 잡은 편이다. 옷장 속에 숨어 있는 개인의 취향과 사연을 옷에 담아내고 싶어 'Beyond Closet'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그의 다음 목표는 이 브랜드를 내셔 널화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