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page

그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에 팬 들은 열광했고, 프레피룩과 고태용이라는 이름은 퍼져나가기 시작했 다. 언론의 인터뷰도 이어졌고,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인기의 단점이라면 프레피룩이 대중화돼서 만원, 이만 원짜리 재킷 이 프레피룩이라는 이름으로 깔리게 된 거예요. 사람들이 굳이 제 재 킷을 40~50만원씩 주면서 살 이유를 못 느끼게 되는 거죠. 반면 다른 부분에서 돈을 벌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의 교복 디자인도 들어왔고, CF를 찍을 때 의상을 제공하기도 했어요. 그 돈으로 지금 컬렉션을 하고 브랜드를 런칭할 수 있었던 거죠.” 고태용 디자이너의 브랜드 ‘Beyond Closet’은 쇼에 전시되는 컬렉션 라벨과 별도로 캠페인 라벨로 백화점 등지에서 판매가 되고 있다. 어 찌 보면 작품을 하는 디자이너 치고는 계산에 능하다는 느낌도 들 정 도이다. 하지만 화려해보이기만 하 는 디자이너가 작품만 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얘기다. “한번 쇼를 해서 옷을 팔고 돈을 벌면 그 돈이 그대로 다음 쇼 비용으 로 나가요. 이윤이 없는 거죠. 그러다보면 돈이 없어서 작품을 못하 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3년 정도 하다 보니 흐름을 알겠더라고요. 그 래서 다양한 활로를 뚫고 있어요.” Vol. 37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51 Peoples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의상을 협찬한 디자이너, 서울 패션위크 최연 소 참가 디자이너 등 고태용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여성스럽 고 감성적인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해병대를 나왔다는 것 역시 그의 특이 이력 중 한 부분이다. 신사동 가로수 길에 위치한 그의 쇼룸에서 2002년 해병 919기로 입 대해 군 생활을 마친 그를 만났다. 8명의 직원들 중 같은 중대, 같은 생활실의 후임인 963기 출신 직원이 있다며 웃는 그는 해병대에서 온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쪽에서도 해병대 출신이라면 선배 분들이 다들 챙겨주죠. 우리는 만드는 수량이 워낙 적으니까 공장에서 작업을 잘 안 해주려고 해요. 그런데 해병대 출신인걸 알고는 해주시는 경우도 있고, 원단을 싸게 주시는 경우도 있죠.” 그는 모 대학의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다 해병대에 입대했다. 사실 그 때까지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군대 에서 즐겨 읽던 패션잡지가 그의 마음속 패션에 대한 열망을 점점 키 워주었다. “말년에는 휴가 다녀오는 애들마다 패션 잡지를 사다달라고 부탁해 서 탐독을 했어요. 그 때는 ‘나도 이렇게 멋지게 입고 싶다.’정도의 생 각이었죠. 휴가 나가면 옷 사느라 바빴어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옷 을 좋아했거든요.” 어렸을 적부터 옷 잘 입기로 소문난 그였다. 부모님 몰래 산 옷을 친 구들과 바꿔 입는 건 둘째 치고, 어머니가 사주신 옷을 가위질 하고 리폼을 할 정도였다. 워낙에 옷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의상학과로 편 입한다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그러려니 하셨다고 한다. 감각과 센스 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그가 패션쇼에 서는 디자이너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다. “교수님들은 대기업에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전 제 이름을 건 브랜드를 하고 싶었어요. 서울패션위크에 서고 싶었고. 하지만 우리 학교를 나와서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한 디자이너도 없었 기 때문에 뜬 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취업이나 하라고 하셨죠.” 동기들은 취업을 준비할 때 그는 옷을 만들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 다. 하지만 연줄도 없고 유학파도 아 닌 그가 서울패션위크에 설 수 있 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무모했다. 서울패션위 크는 18명의 남성복 디자이너가 쇼에 설 수 있는데 60~70명이 지원 할 정도로 경쟁률이 상당하다. 특히 매 번 쇼에 서는 기성 디자이너 들 틈에서 신인이 쇼에 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 신이 있었다. 서울패션위크 한 달 전에야 선발된 참가자를 발표했지 만 그는 3개월 전부터 쇼에 올릴 옷을 만들고 있었다. “쇼를 한 번 하는데 2~3천만 원이 들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애들이 이 론공부 할 시간에 저는 신발을 만들어 인터넷에서 팔았었죠. 그 때 반 응이 좋아서 천오백만원 정도를 모았었는데 이 돈을 갖고 쇼 준비를 했어요.” 만약 그가 서울패션위크에 초대되지 못한다면 그 자금을 홀랑 날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믿었다고 한다. 사무실도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 작업을 했고 집은 패션쇼에 못 오를지도 모를 옷들로 가득 찼다. “난 무조건 될 거니까 안 될 거라는 가정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요. 해 병대 나와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추진력과 자신감, 그리고 믿음. 그 런게 많이 도움이 됐죠.” 그는 그렇게 27살의 나이에 서울패션위크 최연소 디자이너로 기록 되며 홀연히 데뷔한다. 클래식함을 젊은 감성으로 담아낸 그의 작품 에 반응도 뜨거웠다. 쇼에 공개를 한 옷들이 모두 팔려나갔다. 하지 만 그래봐야 본전치기였다. 한 번 쇼를 해서 벌어들인 돈을 다음 패 션쇼에 모두 투자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서울패션위크에서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두 번째 서울패션위크의 테마는 프레피룩. 국내에선 최초로 미국 명 문 사립고 학생들의 스타일을 클래식하게 담아낸 그의 작품에 반응 은 뜨거웠다. 방송사에서 그에게 연락을 해온 것도 그 때쯤이었다.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를 기획 중인데 의상 콘셉트가 일치한다며 협찬이 가능하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사실 처음엔 드라마도 재미없 어 보이고 배우들도 당시에는 큰 인기가 없었던 상태라 망설였어요. 하지만 방송에 의상을 공급하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재미 있겠다 싶었죠.” ① 신사동 가로수 길에 위치한 아담한 그의 쇼룸 ② 작년 동대문에 이미테이션 제품이 퍼졌을 정도로 인기를 끌 었던 티셔츠 ③ 그의 책장에는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었을 패션잡지들이 수 북히 꽂혀 있었다. ④ 원단으로 가득한 수납장. 화려해보이는 삶의 이면에는 작업 실에서 지샌 수많은 밤과 눈물이 숨어있다. 1 2 3 4
26page

F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