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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7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9 Peoples 오고 다시 전성기가 오는 것 같아요.” 실제로 한 동안 뜸했던 그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기 시작 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한 중턱쯤 온 것 같다는 그는 모든 게 생 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되고 있다고 얘기한다. 게다가 첫 번째 전성 기 때의 인기와 경험은 그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월의 연 륜이 젊은 시절 강렬함과 더해져 힘이 있으면서 성숙한 작품들이 나 오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세잔 같은 화가들을 보면 마지막 작품들이 정말 좋아 요. 작가는 마지막에 불태우는 게 있어야만 대가예요. 이제 불이 붙 기 시작하는 단계예요. 이제부터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될 것 같아요. 그 때는 대가가 되는거죠.” 그는 오는 2012년에 그 전성기가 다시 올 거라고 스스로 예상했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2012년 전시회까지 계획되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내년 1월 시애틀 아트센터 전시회는 미국과 뉴 욕 공략의 시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욕심은 작품활동 그 자체에 있는 듯 했다. 내년에는 다시 라벤더 농장을 떠나 자유롭게 이 집트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작품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밝힌 그는 전 시회에 대한 소망 한 가지를 이야기 했다. “전시회를 하게 되면 화랑이나 관객들을 위해서 찾아가야 되잖아요. 이걸 안 했으면 좋겠어요. 작품만 보내고 안 가는 거죠. 피곤하거든 요. 인사하고, 기분 좋아서 마셨지만 술 마시는 것도 정신없다고. 시 차 바뀌니까 시간 낭비도 많고 그래서 나를 초청할 때도 “그림만 보 내고 오지 마세요.” 이랬으면 좋겠어요. (웃음)” 이 화가. 자유분방해도 너무 자유분방했다. 백발에 스웨터를 입고 커 피를 마시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월남전이나 마약, 술집 기도의 모습 은 찾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가 터뜨리는 너털웃음에는 아직도 20대 때의 자유분방함이 묻어났다. “해병대와 전쟁터에 갔다 온 데서 많이 배웠어요. 삶을 깊게 볼 수 있 었거든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하나의 모험처럼 생각했고 그걸 이겨 냈던 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해병대의 안 되면 될 때까 지 하는, 어려워도 그걸 즐기면서 이 겨내는 것. 그런 정신이 제 인생 에 많은 도움이 됐죠.” 화가 최동열만큼 자유분방하게 인생을 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한국말의 억양이 조금은 낯설게 느낄 정도로 미국의 삶이 더 편 안하게 된 그이지만, 17살 해병대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아직도 반가 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해병대 정신, 해병혼, 영원한 해병. 이런 것들을 어릴 때는 잘 몰랐는 데 살아가면서 우리 해병대가 얼마나 특별한지 느끼게 되죠. 미국에 서 미 해병만 만나도 나도 월남전 참전했던 한국해병이라고 소개하 면서 얼마나 반가워하는데요~ (웃음)” 공항에서의 짧은 만남이 있은 몇 일 후. 라벤더 농장에서 찍은 그의 사진이 메일로 날아왔다. 라벤더를 깔아놓고 시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내후년 쯤엔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것이 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전시회장에 있을 그를 보면서 혼자 웃게 될 것만 같다. ‘아이고 이 아저씨. 어지간히도 귀찮아하고 있겠구먼.’ 너무나 뜨겁고 자유로운 삶을 산 최동열 화백.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하고 싶은 건 다해봤다는 그가 보여줄 뜨거운 열정과 강렬 함이 철철 넘치는 그림을 기대해본다.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 를 꿈꾼다. 디자이너 고태용 화려해 보이는 디자이너의 세계, 그 이면에 숨겨진 고난과 역 경 해병대 정신으로 이를 극복해낸 서른 살 젊은이의 도전과 성 공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