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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은 마약과 폭력이 유행하는 험악한 상황에서 신표현주의, 힘 있는 그림들이 주목을 받던 때였다. 20대 젊은이들이 억지로 힘 있게 그려 내려던 그림과, 전쟁을 겪고 자연과 함께 살던 사람의 에너지가 자연 스레 녹아 있는 그림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세계 미술의 초점이었던 뉴욕 이스트빌리지. 순수예술을 부르짖던 젊은 예술가들은 폭력과 공포마저도 아름다운 경지로 승화시킨 최동 열 화백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촉망받는 예술가들과의 단체전 에 연이어 초대됐고 언론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개인전을 열면서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엘디와 함께 한 2인전에서는 오프닝 날 작품이 다 팔려버릴 정도의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귀국해 전시회를 열기로 마음을 먹는다. 혈혈단신 떠날 때와는 달리 “뉴욕이 주목한 한국화가” 라는 타이틀 을 단 채, 그리고 임신 7개월 차인 파란 눈의 신부를 데린 채 그는 돌 아왔다. 반응은 뜨거웠다. 뉴욕과 유럽에서 득세하던 신표현주의는 그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호 기심을 자극했고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의 뜨거운 작품은 젊은 예 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으며, 한국 수집가들의 침을 흘리게 했다.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나 같은 작가도 없었죠. 백남익 선생님과 나 이 정도였어요. 지금보다 훨씬 강렬한 작품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봤던 거죠. 그림 좋아하는 재벌가 사람들은 다들 사들이고 그랬어요.” 한창 잘 나가던 1990년 중반. 정착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가 시애 틀 북쪽 올림픽 반도의 시골 마을에서 자그마한 라벤더 농장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가기 시작한 것 도 이 때 쯤이었다. 그 선택의 이유에는 사랑스러운 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이솔. 그의 삶 만큼이나 딸을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던 아 버지는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어린 딸을 키웠다. 이제 부모처럼 예술가가 된 딸의 이야기를 하는 최동열 화백. 그의 표 정은 왠지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 다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홀가분함. 실제 그는 예전의 뜨겁고 열정적인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됐다고 얘기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다시 젊은 시절 강했을 때의 기분으로 하고 있어 요. 아이가 있을 때는 그러지 못했는데 요즘은 안 좋은 걸 보면 한 번 씩 ‘패버릴까’ 라는 기분도 들곤 해요.(웃음) 그러니 작품도 강하게 나 Vol. 37 Peoples 여지가 없다. 현지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의 존재는 비록 사병이지만 무척 소중했으리라. 17살의 나이에 어딘가에서 꼭 필요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가 파병기간을 1년 더 연장한 것 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좋았어요. 혼자 있어서 외롭고 위험하기도 했지만 전 월남을 좋아 했어요. 그리고 또래들은 경기고에 갔지만 저는 전쟁터에서 있었죠. 멋있잖아요. (웃음)” 귀국 후 서울에서 편히 전역할 수도 있었지만 뛰어다니고 박박 기는 생활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포항행을 선택한다. 마침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그 소망은 이루어진다. “그 사건이 일어나서 훈련 강도가 무척 세졌어요. 한 겨울에 ‘김신조 가 어떻게 뛰어서 내려왔으니 우리도 해야 된다.’ 라면서 지독하게 했 죠. 어휴 어려웠어요. (웃음)” 해병대를 전역한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교환학생 신분이었지만 그 는 애초에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에 자리 를 잡기 위해 영주권을 따는 과정에서 해병대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된다. “당시 첩보부장이 나중에 해군 정보 부장을 하셨어요. 영주권을 받는 데 대한민국 해군 정보부장이 최동열은 월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 웠다고 추천해주니 금방 받았죠. (웃음)” 이제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유도를 했던 경험을 살려 도장에서 흑인들을 가르치기도 했었고, 술집의 바텐더로 일하기도 했다. 인심 좋은 농부 같은 최 화백은 자신이 한 때 잘 나가는 술집 기도였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내 아래 흑인 덩치가 4명이나 있었어요. 해병대 출신이고 전쟁터도 다녀와서 그런지 눈빛이 달랐나봐요. 당시 5시간에 백 불이나 받을 정도니 제일 비싼 기도였죠.” 하지만 그 생활이 그리 정상적인 삶의 패턴은 아니었다. 싸움, 마약, 섹스에 탐닉하던 그는 이제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에 글을 쓰기 시작 한다. 그리고 영화 ‘욕망의 전차’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 뉴올리언스에 서 그의 삶은 또다시 변화하기 시작한다. 예술가 카페에서 글을 쓰던 최동열은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엘디를 만난다. 첫 만남에 서로가 통하는 것을 안 그들은 거침없는 예술의 여행길에 오른다. 그가 어느 날 화가가 되어 있던 것도 그 때의 일이다. 갑자기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그는 정육 점으로 가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 통 샀다. 100m나 되는 종이에 ‘뛰 는 말’을 5~6회의 붓놀림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1,000마리 쯤 채워 졌을까.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한 획으로 주욱 말 한 마리를 그려냈 다. 그 그림을 카페에 걸면서 그는 홀연히 그림의 세계로 들어선다. “산과 바다를 누비면서 작업을 했어요. 야영을 하고 차 안에서 자면 서 히말라야, 인도, 아프리카 곳곳을 다녔어요. 유카탄이라는 멕시코 정글에서 6개월 있을 때는 움막에서 먹고 자면서 작업을 했는데 그 때 가장 좋은 작품이 나왔던 것 같아요.” 때로는 독전갈을 막아줄 닭을 키우며 해먹에 몸을 누인 채 여름을 보 내기도 했고, 때로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소라와 홍합으로 끼니를 때우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원시적인 수렵생활 속에서 거칠고 뜨 거운 삶만큼이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작품들이 나왔다. 마침 당시 뉴 대한민국 해병대 www. rokmc.mil.kr 47